"이제 제가 누나 용돈 줄 수 있어요"

부모 없는 세상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남매

등록 2006.02.01 11:54수정 2006.02.0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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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잠깐 아래층에 내려갔다 오니 용길(가명)씨가 정 선생 옆에 앉아 있다.


"어, 오늘 근무 안 해요?"
"오늘까지 쉬어요."
"쉴 수 있을 때 푹 쉬지, 이렇게 찾아왔어요."
"누나 일자리도 알아보고, 선생님들께 새해 인사도 드리려고 왔어요."

프로그램실에서 누나랑 같이 차나 한 잔 하자며 정 선생이 5층으로 데리고 간다. 용길씨에게 정 선생은 엄마나 다름없다.

a 구직자들이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

구직자들이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 ⓒ 이명숙

용길씨는 지난해 11월 14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드디어 정규직이 되었어요" 기사의 주인공이다. 그는 잠시라도 짬이 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물론,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정 선생에게 전화를 한다.

이사를 가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몸이 아픈데 말 안하고 회사 안 가도 돼요? 이사 때문에 일찍 들어가야 되는 데 조퇴해도 돼요? 월급 받았어요, 상여금도 받았어요, 기분이 좋지 않아요, 누나 때문에 걱정이에요…, 이틀 정도 전화를 건너뛰면, 어제 전화 드려야 되는데 못 드렸어요 등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될지 정 선생의 조언을 구하곤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어줘야 되고, 어떤 날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걸어와 한 말 또 해 줘야 되는 상황에 때로는 짜증이 날 만도 한데, 정 선생은 단 한 번도 얼굴 찌푸린 일 없이, 용길씨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선생님은 용길씨 엄마예요, 엄마."
"상담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일하면서 월급까지 받고 있으니, 얼마나 좋아"라며 그저 웃기만 하는 정 선생을 보면서, 항상 넉넉함을 배운다.

동생 뒷바라지에 이십대 청춘 바친 누나


정 선생을 뒤따라 5층에 있는 프로그램실로 내려가니, 용길씨와 똑 닮은 누나가 있다.

그동안 입만 열면 용길씨가 걱정을 했던 누나다. 용길씨에게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다. 누나가 중학교 2학년, 용길씨가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용길씨에게 누나는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기도 하다. 서럽고 힘들 때마다 서로 마음 붙이며 살아온 남매의 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용길씨가 걱정했던 대로 29살 누나는 손가락만 대도 쓰러져 버릴 것 같다. 화장기 하나 없는 29살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160cm 정도 키에 몸무게를 물어보니 정확히는 모르지만 40kg이 안 될 거라고 한다. 용길씨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방직공장 3교대 생산직으로 취업했다. 주간 근무가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 오후 근무는 오후 2시 30분부터 오후 10시 30분, 야간 근무는 오후 10시 30분부터 오전 6시 30분인 방직회사에서 8년 8개월. 누나에게 세상은 방직공장 생산라인과 기숙사, 그리고 동생뿐이다.

"그동안은 저를 돌아 볼 시간이 없었어요. 동생 뒷바라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앞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나을 기약이 없는 동생의 병원비, 쉽게 취업이 되지 않은 동생의 용돈, 먹고 입을 것 등을 챙겨야 했던 누나의 이십대 청춘은 방직공장 실과 함께 사라져갔다.

데이트 한 번 해 본 적 없고, 립스틱 한번 발라 본 적이 없다는 누나의 얼굴은 파리하다.

근무하는 동안 휴일 외에 단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다는 누나. 8년 8개월 근무하면서 월차나 연차가 있는지조차 몰랐다는 누나는 아무리 아파도 쉬면 안 되는 걸로만 알았다고 한다.

"누나 덕분에 저는 아쉬울 것이 없었어요. 이제 제가 누나한테 잘 해 줘야 돼요."

월급은 저축을 하고 상여금이 나오면 누나한테 용돈을 주기로 했다는 용길씨는 누나가 치료를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한다.

"몸이 아픈데 일할 수 있겠어요?"

건강 때문에 일을 관두려고 하는데, 완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곳에 취업을 한다면, 손에 익은 일이 아니라, 더 힘들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누나가 희망하는 곳은 주간 근무만 하는 생산직으로 임금이 많아야 된다는 거였다.

당분간 직장을 쉬면서 건강이 회복된 이후에 취업을 하겠다면 모르겠는데, 어차피 원한 곳도 생산직이었고, 만약에 취업을 한다 하더라도 현재 다니는 곳보다 근무환경이나 복지시설은 더 열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곳은 어때요? 주간근무만 하는 사람도 있죠?"
"주간 근무만 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제 내가 누나에게 용돈 줄게"

누나와 용길씨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자각이다. 누나에게 2교대나 야근이 없이 생산현장에서 근무를 할 경우 임금은 평균 월 75만원 정도며, 대부분 업체들이 야근이나 2교대 근무를 해야 된다고 하자 놀란다. 어차피 생산직을 할 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보다는 주간근무가 가능하다니까, 현재 상태를 말하고 몸이 완치될 때까지 주간근무를 해 보는 게 어떻겠냐며 조심스럽게 말을 한다.

"주간근무만 하면 월급이 적잖아요."

누나가 월급이 적어진다며 걱정을 하자 용길씨가 끼어든다.

"누나, 내가 용돈 주기로 했잖아. 그동안 누나가 나한테 다 해 줬잖아. 이제 내가 누나한테 해 줄게."
"그래요. 동생이 도와준다잖아요. 동생도 자리를 잡았으니까 돈에 연연해 하지 말고, 몸이 재산이에요. 특히 없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디 있어요."

정 선생이 용길씨를 거든다.

"몸이 아파서 쉬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겠는데, 나와서 다른 데로 가겠다고 하니까 하는 소리예요. 8년이 넘게 근무했으니 그 곳에서도 청을 들어 줄 거예요."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위에는 양배추 즙이 좋다고 하니까, 시간이 있을 때마다 양배추 갈아서 마시고 앞머리를 살짝 다듬으면 더 예뻐 보일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앞머리가 너무 길어 자르려고 했다는 누나와 누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용길씨에게 당부한다.

건강관리는 평소에 해야 되고, 의논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병원에도 가고, 먹을 것도 잘 먹으라며.

a 구직자들이 활용가능한 서비스들

구직자들이 활용가능한 서비스들 ⓒ 이명숙

이십대 청춘을 오직 방직공장과 기숙사, 동생에게 바친 누나와, 정 선생을 엄마처럼 의지하는 용길씨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고용안정센터다. 선생님들 조언대로 직장을 옮기지 않고 몸이 나을 때까지 주간근무만 할 수 있도록 말을 해 보겠다는 누나와 누나 건강을 걱정하는 남매 간의 사랑을 지켜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진다.

부모 없는 세상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14년. 동생 걱정에 뒤돌아 볼 여유조차 없었던 누나는 번듯한 직장인이 된 동생이 대견하고, 지금까지 누나에게 신세만 졌던 용길씨는 누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기만 하다.

아픈 누나가 어서 빨리 나아서 데이트도 하고 결혼도 했으면 좋겠다는 용길씨의 바람대로, 이십대 청춘을 방직공장에서 보낸 누나에게 꽃피는 봄이 돌아오면, 좋은 남자친구가 생겨 "우리 누나에게 애인이 생겼어요"라는 용길씨의 반가운 전화를 받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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