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소주 마시는 계절?

이은채 시집 <봄은 소주를 마신다>

등록 2006.02.01 14:15수정 2006.02.0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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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어느 봄날에 있었던 일이다. 햇빛은 시집을 마시고, 봄은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상야릇한 이 문장의 내용이 무슨 말인가?

2004년 3월, 이른 봄날에 나는 서점에서 시집 한 권을 샀다. 이은채 시인의 첫 시집 <봄은 소주를 마신다>(시와시학사, 2004)가 그것이다. 당시 출판사 시와시학사에서는 두 종류의 시집을 펴내고 있었는데, 기성 시인들의 시집인 <시와시학 시인선>과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을 펴내고 있는 <푸른 시떼>가 그것이다.


a 이은채 시집-봄은 소주를 마신다

이은채 시집-봄은 소주를 마신다 ⓒ 시와시악사

'봄은 소주를 마신다'라는 독특한 제목의 이은채 시집은 '푸른 시떼 9'였는데, 겉표지 색깔이 연한 분홍빛이었다. 나는 이 시집을 새로 구입한 자동차 산타페 앞 유리 아래 빈 공간에 놓아두고는 무슨 바쁜 일이 있었는지 한 달 가까이 시집을 읽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복사꽃빛도 아니고 벚꽃빛도 아닌 흰색을 머금은 연분홍빛깔의 시집 <봄은 소주를 마신다> 겉표지 한 쪽 부분이 서서히 탈색되고 있었다.

이걸 보면서 나는 '봄은 소주를 마신다'라는 제목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봄날의 햇빛이 시집을 다 마시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메모를 해두고는 언젠가 봄빛이 시집을 다 마신다는 내용을 갖고 시를 한 편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끝내 시도 쓰지 못했고, 시집도 읽지 못했다. 이 시집은 다른 여러 권의 책들과 섞여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가게 되었고, 2년이 지나 다시 봄날을 얼마 앞둔 2006년 2월에 그 시집을 다시 찾아들었다.

나는 이은채 시인이 누군지 잘 모른다. 시집 겉표지에 있는 약력도 간단하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고, 1997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그 해 웅진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약력의 전부다. 독특한 제목의 시집 <봄은 소주를 마신다>의 차례를 보니, 시집 속 작은 제목들도 특이하다. 1부는 '여우, 여우 같은'이고, 2부 '내 몸속을 그가 간다', 3부 '붉은 노을을 물고 눕다', 4부 '위독한 봄밤'으로 되어 있다.

시집의 첫째 편과 둘째 편 작품에서부터 시의 내용은 적막에 갇힌 한 영혼이 좌절과 슬픔의 언어를 토해내는 어두운 빛깔로 되어있다. 시는 이렇게 진술되고 있다. "평일 낮 두 시의 벤치가 늙은이마냥 다리를 벌리고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더군 자꾸 막막해져서 더듬더듬 소주를 마셨네/꽃이야 피든 말든 나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위험한 그림'), "우리 슬픈 영혼 어디쯤 풀어놓으랴/적막, 성큼성큼 어둡다"('그네'). 시 제목을 빌려 말한다면 이은채의 시집 <봄은 소주를 마신다>의 밑그림은 '위험한 그림 속 그네에 붙들려 있는 존재의 흐느낌' 같은 것이다. 시집 속에는 슬픔과 상처, 어둠의 음색(音色)으로 가득 차 있다.

납죽납죽 받아 마신 낮술에,
취기가,
물오르듯
내 아랫도리를 은밀히 더듬고 있다

봄은 소주를 마신다


저기, 저, 먼 데 산골짜기 아래
복사꽃 불콰히 부풀어오르는 구릉이 구렁이같이
산의 가랑이 속으로 꿈틀, 꿈틀,
기어들고 있다

- '봄은 소주를 마신다' 전문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는 언어의 감각적 표현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다. 시적 화자도 봄도 소주를 마신 상태여서 서로가 스며들어 취기가 물오르듯 혼몽한 상태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복사꽃 불콰히 부풀어오르는 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무릉도원(武陵桃源) 아닌가. 시인 이은채가 그려내고 있는 봄날의 무릉도원은 상당히 에로틱하면서도 역동적이다.


"저, 먼 데 산골짜기 아래/복사꽃 불콰히 부풀어오르는 구릉"을 "구렁이같"고 하고, 그것도 "산의 가랑이 속으로 꿈틀, 꿈틀,/기어들고 있다"고 한다. 1행으로 된 2연의 "봄은 소주를 마신다" 언술에 의해 화자인 나와 봄날이 취기가 함께 오르고 산의 가랑이 속으로 꿈틀, 꿈틀 기어들어가고 있는 봄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겹의 구조로 되어 있는 시 '봄은 소주를 마신다'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 재미가 되살아난다.

봄에 생겨난 것들은 전부 바깥에 있다
바깥은 또한 전부 봄 안에 있어 밝다
저 강, 저 들, 저 산
몸 풀리는 것들, 싹 트는 것들, 노래하는 것들
아프다. 상처 아닌 것들이 없다
- '바깥은 봄' 전문.


이 시도 안과 바깥이라는 이중적 시각, 즉 겹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몸 풀리는 것들, 싹 트는 것들, 노래하는 것들"은 모두 "상처 아닌 것들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슬픔과 상처, 어둠(캄캄함)이라는 이은채 시인의 생의 체험에서 얻어진 것이리라. 이러한 생의 체험을 이은채 시인은 구질구질 늘어빠진 젖은 목소리가 아니라 감각적인 언어로 그려내어 독자에게 분명하고 힘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은채의 시를 두고 문학평론가 이혜원은 "유연하고 감각적인 언어들이 삶의 상처와 굳은살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리하여 한없이 적막하고 서럽던 풍경마저도 '화사한 비애'로 빛나게 된다"고 평하고 있다.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이 상처의 힘으로 생의 바다를 노 저어 가는 것 아닌가.

햇빛은 시집을 마시고, 봄은 소주를 마시고 다시 나는 이은채의 시집을 마시고 있다. 많이 취했나 보다. 연분홍빛의 이 고운 시집이 나를 다 마셔버린 듯하다. 봄날이 깊으면 시 한 편 쓸 수 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 이은채 시집 '봄은 소주를 마신다'(시와시학사, 2004)

덧붙이는 글 이은채 시집 '봄은 소주를 마신다'(시와시학사, 2004)

봄은 소주를 마신다

이은채 지음,
큰나(시와시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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