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흐르되 다툼을 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저 막아서는 바위가 있으면 돌아가고 더 이상 흐르지 못할 곳에서는 땅으로 스며든다. 물은 자신의 형상을 고집하지 않는다. 넓은 곳은 얕게. 좁은 곳은 깊게 흐른다.
바람은 스쳐지나간다.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감싸고 어루만진다. 가끔 광풍과 해일로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하늘을 떠가는 구름 역시 가야 할 길을 가는 것 뿐. 바람이 이끄는 데로 그저 떠가면 되는 것이다.
무엇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버리려 하는 것 역시 욕념(欲念)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억제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머물되 그 어떠한 것이던 순리대로 따르는 과정이 깨달음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사물 모두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그의 몸속으로 광풍이 휘몰아치고, 해일이 밀려들었다. 고통은 이미 인간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지만 그 고통 역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는 거부하거나 제어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유롭게 몰아치도록 온몸의 혈맥을 열어놓았다.
광폭한 기운은 그의 일부분이 되었고, 극한의 고통 또한 그의 몫이었다. 광폭한 기운은 그의 전신을 산산이 부셔놓는 듯 했지만 어느덧 그 고통까지도 그의 몸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점차 궁극으로 다가갈 때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현심경의 지고 정순한 운기토납(運氣吐納)도, 태극산수의 부드럽고 현묘한 움직임도, 만검의 끝없는 검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연의 법리에 역행하지 아니하고, 순리에 따르는 것이다. 본연의 것에 순응하고 동화해 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고, 매우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또 하나의 깨달음의 계단에 발을 디디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이를 극복해 낸다면 좀 더 완벽하게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하나의 무학에 정형화된 형(形)과 격(格)을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는 무인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위기란 항상 위험과 기회가 상존하는 것이다. 마치 빛과 그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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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었다. 셋째의 염화심력(念火心力)이 아니라면 허공을 격하여 공력과 진기를 순간순간 끊어 놓을 수 없다. 자신의 진기마저 일순간 끊어 놓을 정도라면 아마 셋째는 이미 염화심력을 대성했음에 틀림없었다.
"되도록 대형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구려."
모습을 보인 인물은 셋째 방백린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줄기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는데 아마 장철궁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 것 같았다. 헌데 뜻밖에도 그의 뒤를 따르는 초로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좌상(左相) 과(裹)노인이란 자였다. 그가 어떻게 방백린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방백린을 따르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매우 공손해 누가 보더라도 주종관계(主從關係)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뒤로 또 다른 다섯 명의 인물들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독특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바로 절대구마의 후인들로 구마 중 한 명을 제외한 여덟 명이 한꺼번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짐작은 했다만 형제의 정리마저 버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장철궁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사형제 중에서 음모를 꾸미는 자가 있다면 방백린일 것이라고 운령에게 들었던 터였다. 운령은 확신하고 있었고, 수차례에 걸쳐 은근하게 내비쳤다. 하지만 장철궁은 지금까지 참아왔다. 설사 방백린이라 할지라도 사형제간 서로 검을 맞대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했소. 대형께 죄송할 따름이오."
"무엇이냐? 무엇이 형제의 정까지 끊게 하고 형제의 가슴에 검을 겨누게 했느냐?"
지금도 역시 그랬다. 책망하는 것도 아니었고,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된 현실이 서글펐을 뿐이었다. 방백린 역시 안타까운 기색을 떠올렸다.
"이렇게 해야 하는 소제의 마음도 대형만큼이나 찢어질 듯 아프오. 소제는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하오. 소제는 처음부터 그렇게 키워졌소.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것을 배웠고, 지금까지 그것을 위해 살아왔소. 하지만 대형은 소제가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방백린은 사형제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사형제 중에서 설득이 되지 않을 인물은 오직 두 사람이었다. 바로 장철궁과 강명. 그들을 얻는다면 방백린은 날개를 단 호랑이가 될 수 있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 설득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때였다. 지금까지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있던 운령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우어--- 어----!"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방백린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 원망과 질책이 섞인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의미가 전달되기 충분했다. 방백린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맺혔다.
"운령….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이 우형이 너에게 무슨 변명을 하겠느냐? 하지만 잠시 참아다오. 대형과의 일을 마무리 짓고는 너에게 모두 말해주마. 그래도 네가 인정하지 못한다면 평생 나를 원망해도 좋다."
운령은 뭐라 하고 싶었지만 장철궁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소처럼 큰 장철궁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흐를 것 같았다.
"네가 말한 것은 본교의 염원이다. 본교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꿈이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네가 정점에 서기를 바랐던 것이냐? 거추장스런 이 우형과 백결을 없애고 네가 권좌에 앉고 싶었던 것이냐?"
"아니오."
장철궁은 방백린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본교의 염원이 성취된다면 이 우형과 백결은 너를 위해 물러나게 되었을 것을…. 너는 너무나 조급한 마음에 형제의 가슴에 칼을 겨누었구나."
방백린 역시 마음이 아팠다. 단지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는 길이 아예 다른 것을 어쩌랴! 그 역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오. 그것이 아니오. 본교는 한계가 있소. 본교의 염원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세상을 바꿀 힘이 없소. 우매한 농민들은 우리를 열렬하게 지지하겠지만 나라를 세우고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안 되오."
"황제가 되려는 게냐? 주원장과 똑같은 방식으로?"
백련교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은 게 주원장이다. 방백린은 고개를 흔들면서 변명처럼 말했다.
"나는 주원장과 다를 것이오. 아니 분명 나는 주원장과 다르오."
"후훗… 녀석… 어차피 너 역시 네 핏줄을 위한 황실을 만들 것이 아니냐? 결국 똑같은 것을… 형제의 가슴에 검을 꽂고, 동료의 목을 베야하는 일이라면 그와 무에 다르랴…!"
탄식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방백린은 인정하지 않았다. 주원장은 천민 출신이었다. 그의 피에는 천한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에 비해 자신은 황가의 혈통을 받은 사람이었다. 만인이 마음으로 승복하고 은혜를 베풀 성군(聖君)의 피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겠소. 다만 형제들에게 죄송할 따름이오."
방백린이 정중하게 장철궁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것은 이만 말을 끝내자는 의미였고, 이제는 죽어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다른 것은 모른다. 하지만 네가 운령을 버리고 저 간교한 뇌마(腦魔)를 택한 것만으로도 너를 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게 될 것이다."
절대구마의 후인 중 삼군(三君)인 뇌마. 장철궁의 시선은 방백린의 뒤에 공손히 서있는 과노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좌상 과노인. 그가 바로 뇌마였던 것이다.
"소제는 절대 운령을 버리지 않소. 운령이 나를 죽이려 든다 해도 말이오."
방백린의 얼굴에 처음으로 노기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무형의 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막을 형성하는 듯 했다. 그 무형의 막 저편의 사물은 마치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굴절되어 보였다.
"헛…!"
장철궁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는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려 방백린이 내뿜는 염력에 대항했다. 더구나 몸에 박혀있던 요서보검이 무엇엔가 감응하듯 더욱 깊이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부상을 당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모르되 지금 이 상태에서는 방백린의 괴이한 염화심력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나머지 인물들은 그저 지켜보는 가운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군과 회마가 장철궁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 85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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