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굶은 달에서 올라오는 시

이승희 첫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등록 2006.02.03 14:17수정 2006.02.0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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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새해 벽두 창비에서 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이 나왔다. 이승희 시인의 시집<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가 그것이다. 196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1997년 <시와사람>에 '집에 오니 집이 없고'를 발표하고,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풀과 함께'가 당선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는 이승희 시인이 등단 9년 만에 펴낸 첫 시집이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고통스러웠던 현실적 삶을 시인은 과장된 포즈 없이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 속에서 힘겹게 삶의 새 씨앗(희망 혹은 길)을 찾아내고 있다. 이승희의 시에서는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장황한 요설(饒舌)이나 파격의 어법은 찾아보기 어렵다. 손쉬운 초월(超越)에도 기대지 않는다.


가난하고 힘든 삶의 경험적 충실성에서 이승희의 서정은 비롯된다. 표제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에서 그는 "얼마나 배고픈지 볼이 움푹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밤새 달그락 달그락대는 달//밥 먹듯이 이력서를 쓰는 시절에"라고 쓰고 있는데, 우리는 이 짧은 시에서 신산(辛酸)했던 그의 삶의 이력을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기실 저녁을 굶은 것은 달이 아니라 밥 먹듯이 이력서를 쓰고 있는 화자 자신일 터이다. 1연과 2연의 전(全) 시행이 "밥그릇 같은"과 "밥 먹듯이"에 기대고 있는 걸 보면 그게 시적 화자에게 얼마큼의 강도로 다가선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돌멩이를 보면 아직도 화염병 냄새가 진동해. 떠날 사람들 다 떠나고 남은 이들 없지만, 아직 돌멩이는 화염병 냄새를 제 속에 품고 있었던 거야. 누가 오라고 불렀는가, 누가 가라고 했는가, 남은 것은 말없이 오랜 강물바닥을 흘렀을 돌멩이뿐인가.
누님 만나러 벽제 가는 길

못난 돌멩이 하나가 젖먹이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못자리로 들어가는 논물을 본 일이 있는가? 그렇게 쏜살같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맹렬하게 들어가지. 아, 얼마나 이쁘냐. 언젠가는 멈출 일이지만 그야 논둑 안의 물들이 평등한 높이가 되어야 하지. 어느 구석, 어느 낮은 곳 남겨두고서야 그 물길 멈추는 것 보았는가.
논물 회오리 멈춘 그 자리 참 맑아, 꽃보다 맑고 하늘보다 푸르른 착한 누님 발 씻겨드리면 정말 좋겠네.
벽제 가는 길

열아홉살 방직공장누님 눈물도 없이 말라갈 때, 내가 던진 돌은 다 어디 있는가. 누님의 가슴팍에 빼어 던진 돌이 왜 아직 거기 그대로 있는가.
- '아직은 봄이 아닌걸-벽제 가는 길 2. 전문



인용한 시는 시집 맨 앞머리에 편재되어 있는,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벽제 가는 길'이라는 연작시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가난하다는 것인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 순간 돌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다른 시를 보면 '벽제 가는 길'은 가방장에 다니고 있는 누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 누님은 어린 시절 날 업고 줄넘기를 했다는, 참꽃에 찔레 새순 벗겨주던 그러나 지금은 흰머리 둥실둥실 자꾸만 가벼워지는 누님이다. 이 시에서 가슴을 파고드는 못난 돌멩이는 시적 화자의 대유(代喩)물인지 모른다.


이른바 386세대로서 80년대의 시대적 아픔에 심한 몸살을 앓았을 시적 화자는 "누님의 가슴팍에 빼어 던진 돌이 왜 아직 거기 그대로 있"어 "아직은 봄이 아닌 걸"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논둑 안의 물들이 평등한 높이가" 될 때까지 논물은 "쏜살같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맹렬하게 들어" 갈 수밖에 없다.

이승희 시학이라는 건축물의 주요 자재(資材)는 돌멩이, 물방울, 꽃(감자, 수련, 라일락), 씨앗(새순), 낡은 집이라는 사물들이다. 작고 사소한 이런 사물들에서 이승희는 삶의 곤궁함을 거짓없이 그려내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확인하고 또 生의 씨앗(희망)을 찾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 '내가 바라보는' 전문


사물의 명칭도 아니고 완결된 문장도 아닌 미완결의 제목이 뜻하는 바는 "내가 바라보는" 삶의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라는 것일 테다. 위 시의 버려진 깡통과 버려진 감자 한 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버려진 것들의/쓸쓸함이/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잃지 않는 연대 의식과 민중적 삶의 대 긍정이다. 이러한 이승희의 시를 두고 선배 시인 정호승은 "인간에 대해 또 사물에 대해 연민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시를 쓸 수 없다는 생각을 이승희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2006)

덧붙이는 글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2006)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이승희 지음,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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