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엔 국경이 있을 수 없지만, 사이언티스트에겐 조국이 필요하다.'
황 박사의 어록 중에 기록된 명언 중에서 백미(白眉)로 꼽히는 말이다. 지난 세기에는 그럴 수 있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주의를 부르짖던 그런 시대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과학자라고 해서 '비빌 언덕'이 없어서야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긴 피히테가 살던 시대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19세기 초엽에 나폴레옹의 군화 밑에 짓밟힌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한 나라와 그 곳에 살아야만 했던, 슬픔, 절망, 비탄에 빠졌을 독일인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줘야 할 시대에는 저 말이 큰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야말로 귀 기울이고 지금이야말로 자각할 때이다. 이번에야말로 굳은 결심을 하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곧 하나의 결집된 힘으로 합류하여 커다란 힘을 이룬 전체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결심하라. 우리의 자각을 촉구하는 충동이 오늘처럼 강력하고 절박한 때도 없었다.
이러한 현재에도 분기하지 못하는 자는 분명 모든 감정을 상실한 자이다.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결단은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동요되지 말고 냉각되지 않으며 지속되어야만 하는 결단이다. 독일 민족의 운명은 오직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중대하게 결심할 만한 일에 봉착하고 있는가? 조국이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에라도 빠져 있다는 말인가? 나라를 잃고 독립전쟁이라도 치러야 할 만큼 그렇게 절실한 이슈가 과학계에 남아 있기는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저 애국심에 호소하는 기만적 과학자의 명언은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소리의 바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오늘의 상황 속에선 대중적 감성에 호소해서, 무지한 역사적 진실의 망각에 빠진 사람들을 계몽할 하등의 조건들이 찾아지지 않는다.
이미 우리 사회는 그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사회적 원동력을 여러 방면에서 가지고 있으며, 어느 특정한 한두 사람의 능력에 매달려 나라의 운명이 갈릴 처지에 있지도 않다. 그만큼 우리 국민의 힘과 사회적 분화 능력은 뿌리가 든든할 만큼 확고하게 심어져 있다.
그 뿌리는 깊어서 어떤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땅 속 깊이 박혀져 있다. 또 이성적으로 판단하면서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생각을 수용하지 못할 만큼 닫힌 사회도 아니다. 모든 사회적 공간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져 있다.
오늘의 현실에선, 오히려 '과학자에겐 국경도 없고, 조국도 없으며, 있으면 오직 연구실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조국'이 없어도 자신의 연구를 묵묵히 수행해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 예술을 위해, 용기 있게 조국을 등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전 세계 곳곳으로 지난 시기의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은 채 국경을 넘어 학문적 성과가 주어질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춘 연구소를 찾아 떠나가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조국'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과학적 관심이 어디 있는지만 따질 뿐이다. '진리라는 조국'에 기댄 채 살아갈 뿐이다. 이 점은 과학자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여기 나는 서 있다. 서 있을 수밖에 없다(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이 말은 마르틴 루터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가 1521년에 소집한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되어 '95개 항의 반박문' 철회를 요구한 것에 대해서, 거절할 때 한 말이다.
자신의 신념, 사상,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적 역할로 인하여 종교, 사상, 학문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들의 진리추구의 열정과 독단적 사고를 깨치려는 선구적 노력을 아끼고 또 사랑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왜 죽음으로 자신의 아집에 가득 찬 고집을 관철하려 하는가? 아직도 '여기 나는 서 있고, 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몸부림치는가? 얼마든지 길은 열려져 있지 않은가? 자신의 신념과 열정을 누군가가 제어하고 훼방하고 있기라도 하던가? 언론 표현의 자유는 우리의 생명이다. 죽음이 아니면, 우리에게 연구할 기회를 달라고 목숨을 내걸만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세력이라도 있느냐 이 말이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적 도그마인가? 무엇에 대한 믿음이고, 무엇을 위한 고집인가? 또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촛불시위쯤으로 그 꽁수가 다 밝혀진 학자를 다시 연구실로 복귀시킬 수 있다는 이 발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자. 황 교수가 다시 연구실로 돌아온다 해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을까? 상처받아 연구실을 떠난 학자가 다시 연구실로 되돌아 올 수 있다고 믿는가? 그게 누군가의 음모로부터 시작해서 음모로 끝난 꾸며낸 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자승자박 아닌가? 이건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던가?
비록 '치명적인 인위적 실수'라고 극구 되지 않는 논리로 둘러대긴 했지만 말이다. 학문이 애국심에 호소해서 되는 일이라면 애국심 강한 사람이 진정한 학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학문적 진리 추구와 국익이 혼동되고, 여기다 애국심이라는 이데올로기까지 엮여 있는 세상, 이게 정상적인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아니면, 학문의 세계에 발을 디뎌보기라도 했던 사람들의 장삿속 장난일까?
학자들은 말없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촛불 든 시위자들이 학문의 길을 예비하고, 학문을 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는가? 순진하고 소박한 생각일 뿐이다. 그 생명이 다한 '한' 기만적 과학자를 위해 촛불 시위를 하고, 목숨을 버리다니… 이건 아니다.
광신이란 게 무엇인가? 바로 이게 아닌가? 그건 사이비 종교를 받드는 종교적 집단의 기원과 다른 그 무엇일 수 없는 노릇이다.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아무리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잠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졌다고 하더라도, 되돌이켜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반성할 여유를 가져보기로 하자.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우리는 이성적인 사회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고, 건전하고 양식 있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진실이 몇 사람의 감정적 열정과 종교적 신앙과 같은 믿음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면야 얼마나 다행스럽겠는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세상에 비추어야 할 학자들이 한결같이 "나는 상황을 잘 몰랐다. 나는 속았다. 논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한 일이 별로 없는데 황 교수가 이름을 올려주겠다고 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응낙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들을 해대고 있다.
아니, 논문을 쓴 자들이 모르면 누가 안다는 말인가? 그럼 우리가 그들의 논문을 '바꿔치기'라도 해 놓았다는 말인가?
황우석 주위에 같이 연구하던 자들은 하나 둘씩 떠나갔다. 남아 있는 순진한 저 많은 사람들만이 '저 푸른 물결'을 노래해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한 진리의 바다에 넘실대는 저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있을까?
뒤에 남겨진 흔적들과 치졸한 변명들만이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사기꾼을 길러내는 교육은 참된 교육일 수 없다. 그건 한 나라의 정신이 썩었다는 징표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말로 대중을 속이고, 간교한 혀 놀림 하나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등쳐먹고 사는 자들을 어찌 해야 할 것인가. 그게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말이다. 양심을 저버린 자들을 우린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지적 성실성과 지적 양심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진정한 학자일 수 없다. 그래서 난 메난드로스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인간일 때, 그 인간은 얼마나 우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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