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로 그려낸 지독의 사랑

유자란 시집 <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북랜드,2000)

등록 2006.02.08 17:23수정 2006.02.0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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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에 붙들린 시인이 있다. 2000년 도서출판 북랜드에서 시집<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를 펴낸 유자란 시인이 바로 그다. 3~4년 전에 이 시집이 내게로 건너왔는데, 무슨 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2006년 새해에 이 시집을 펼쳐들고 읽게 되었다.

나비 한 마리가 내게로 건너 온 것은 지난 해였다. 사무실의 한 동료가 몇 십년동안 채집한 나비를 지난 해 가을 한 축제마당에 전시를 했는데, 그 전시장에서 만난 애물결나비 한 마리가 내 가슴 속을 파고들어왔다. 당시 애물결나비가 내게로 건너온 것은 자작시 '애물결나비와 허공'으로 내게 남아있다.


유자란 시인은 1962년 강원도 태백 출생으로 1994년 신라문학 시부문 대상 수상과 1995년 <현대문학>에 '나의 데카당스'외 4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의 첫 시집인 <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는 나비의 물결과 팔락거림으로 가득 차 있다. 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는 나비목 부전나비과로 은갈색녹색부전나비라고도 한다. 한국과 일본, 중국 아무르, 우수리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6~8월에 나타나고 저녁에 잘 날아다닌다. 유충은 너도밤나무과의 떡갈나무 잎을 먹으며 알로 월동한다. 수컷의 날개 앞면이 사파이어처럼 푸른녹색(청녹색)의 광택을 띠고 있어 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로 불려지고 있다. 시집 속에서 시적 화자가 녹색사파이어부전나비의 형상을 빌려 푸드덕 자꾸 날아오르는 것은 죽고 싶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서, 저는 죽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빛으로 인하여 드러난 제 삶의 실체가 저를 슬프게 했으니까요 때로 저는 왜 이토록 징그러운 형상으로 태어났는지 신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욕망 뒤에서 눈부시게 타오르는 것, 그것은 살아서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것, 사랑하므로 영원을 만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기어오를 수도 없는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아, 닿을 수 없습니다 만질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눈부신 존재였습니다 저는 당신의 일부분인 가지에 제 몸의 가슴과 배를 묶었습니다 어둠---침묵---용서---그리하여 눈부시고 눈부신 내 꿈들이 날개를 갖기까지--- - '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 전문

유자란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날개에 관한 꿈을 공급해주신/나비 선생님께/이 시집을 바친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시집 <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는 나비와 날개에 관한 꿈을 공급해준 선생님 또는 당신께 바치는 송가(頌歌)이다. 그에게 나비는 "머지않아 모든 죽은 세계가 눈 뜨는 계절이 오고, 무덤이 갈라지고, 죽은 나사로가 부활하듯 누군가, 태어나리 산맥과 산맥을 들어올리는 저, 가볍고도 눈부신 나비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이 나비의 이름은 "사랑이 내게로 와서/외로워진 내 마음/꽃 피어라/꽃피어라/천둥과 우레로 길을 만들고 가"는 정도의 아픔으로 시적 화자에게 남는 것이다.

나비라는 형상에 포획된 시적 화자의 사랑은 "비상원망(飛翔願望)이라는 병의 포로"가 되어 "먼그리움의시냇가에손닿으려는꽃"의 열망으로, 또 "식물도감 속에 나란히 손잡고 피는/쌍둥이꽃자리였으면 했어요"라는 언술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열망은 시적 화자에게 "당신을 만난 이후 내 가슴에 프로펠라가 달렸나 봐요 윙윙 소리를 내며 가슴은 자꾸만 비행하려고 해요-(중략)-사랑하는 당신, 그대와 나 물 위에 쪽배 띄우고, 두 가닥 실이 꼬여 더 질긴 하나의 실이 되듯, 그렇게 하나되어 흘러나 볼까요, 푸른하늘 은하수나 될까봐요"('진량통신')라는 도저한 낭만적 서신을 쓰게 만든다. 그래서 그에게는 유리병도 "파멸을 꿈꾸며 끓고 있"는 유리병이고, 가스라이타도 "生의 그 무엇을 불사르고자/저지르고자/온몸을 고압가스로 무장한/가스라이타"('가스라이타')이다.

유자란 시인이 꿈꾸는 나비와 같은 사랑은 어쩌면 "고치 속에 갇혀서 눈부신 몽상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긴긴 잠"('유자란 나비 1')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여, 제발 그 꿈(몽상)에서 깨어나지 말기를, 꿈이 아닌 현실은 우리에게 언제나 참혹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는가.


죽어서도 다시 태어나 제 무덤을 둘로 쪼개고 나비로 부활하겠다는 지독(至毒)의 서정시 한 편을 인용하면서 유자란 시집 <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의 글을 끝맺는다.

죽고 싶어라
초록 잔디를 이불처럼 덮고
고운 봉분 속에
끓는 욕망을 잠재울 수 있다면
죽어서
다시 태어나리 제 무덤을
둘로 쪼개고 부활하난
나비
나비
나비
나비의 이름으로 - '나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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