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나한티 뭐 서운헌거 있냐?"

굳이 죄송하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부모님뿐이겠지요

등록 2006.02.15 15:44수정 2006.02.1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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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올래? 남의 딸들은 다 왔드라."


저녁마다 한숨짓듯 토해내는 아버지의 바람에 녹록잖은 살림 탓을 하며 그동안 시원한 대답 한번 드리지 못했다.

다음에 찾아뵐게요. 추석 무렵이면 설을 기다렸고, 설이 다가오면 추석을 기다리게 하면서 난 더디게 오는 봄만큼이나 아버지의 가슴에 기다림만을 안겨 드렸다.

그래도 내 아버지, 딸자식이 저녁마다 걸어주는 전화에 그나마 서운함을 달래고 계셨는데 내 이기심으로 그것마저도 이틀 저녁을 거르고 말았으니 남의 딸들을 싣고 오는 뱃고동 소리가 유난히 애절하게 들렸으리라.

물론, 전화를 걸던 십여 분의 시간이 내 앞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주어져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저 전화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납이라도 단 듯 무겁게 발을 떼는 시곗바늘을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기다리실 줄 뻔히 알면서도 하지 않는 일은 고문에 가까웠다. 지난 십삼 년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향집 전화번호를 누르던 내 손끝은 단지 이틀뿐인 그 저녁에 둘 곳을 찾지 못해 맥없는 걸레를 집어들고, 빗자루를 집어들고,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마음둘 곳을 찾고 있었다.


"전화드려라. 너도 참 독하다. 기다리실 텐데."

남편의 채근에 못 이기는 척 전화를 드려볼까 고민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래 버틸수록 나만 손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막상 돌아보니 내가 부모님에게 드린 것들보다 부모님이 내게 주신 것이 더 많았으니까.


냉장고 안에 든 것들 중 고향집에서 부쳐오지 않은 건 별로 없었다. 김치에서부터 국물 내는 멸치까지.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나와 아이들에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고향이라는 그 푸근함을 안겨주신 것이다.

지난 금요일 점심 무렵 남편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전해져왔다.
"어머니 서운해 마세요! 제가 잘 달래서 전화드리라고 할게요. 예, 점심 먹었어요. 어무니도 식사 잘 챙겨서 드세요."
무뚝뚝하기로 치자면 돌부처 못잖은 남편이 고향집으로 전화를 넣어 살가운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남편이 작은방으로 건너왔다.

"어무니가 섭섭한 거 없다고 저녁에 아버지 들어오시면 전화하라던데."
"진짜 섭섭한 거 없대?"
"그래. 쯧쯧쯧."
"아부지는 어디 가셨대?"
"궁금하면 전화해보면 되겠네?"
"내가 왜? 나는 아직 서운한 거 안 풀렸거든."

보리쌀 한 되도 못 바꿀 자존심으로 이제껏 서른 해를 살아온 나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이기에 가타부타 대꾸없이 담배 한 개비만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틈에 살짝 큰방으로 건너와 전화를 걸었다.
"여보시요"
"엄마!"
"니 나한테 뭐 서운헌 것 있냐? 느그 아부지가 엊저녁 내 전화 지달맀는디. 뭐 서운헌 거 있으믄 말해봐라."

서운한 거 많았다. 너무 많아서 하루종일 말해도 다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라니 말이 되어 나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 어떤 서운함도 내 이기심과 욕심에서 나온 것들뿐이라 말이 되는 순간 세상에서 제일 유치하고, 가치 없고, 무의미한 것들뿐이었다.

"서운하기는 뭐가? 전화드리잖아요. 근데 아버지는요?"
"초상이 나서 상갓집에 갔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또 엄마는 물어왔다.
"언지 한번 왔다가그라."
"예"
엄마는 무심히 던진 내 대답에 반색을 한다.
"언지 올래?"
"지금, 지금 갈게요."

대답을 해놓고 보니 또 못 갈 건 뭔가 싶었다. 언제나 작아서 불안하다고 투정부리던 차도 바꿨겠다, 마침 유치원 다니던 아이 졸업도 했겠다 해서 부랴부랴 짐을 챙겨 고향집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여수에 도착하고 보니 저녁 여덟 시가 가까웠다. 섬으로 가는 배는 아침이 돼야만 탈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집에 들러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섬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가슴 한 편에 서운한 가시 하나쯤은 감춰 두고 있는 딸에 비해 부모님은 언제나처럼 두 팔 벌려 딸 사위와 손자를 맞아주셨다. 굳이 죄송하단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굳이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게요 하는 용서도 필요치가 않았다.

고향집마당에서 노는 햇살이 그대로이듯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 가슴에 미련한 서운함이 싹트기 전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보듬어 안아주셨다.

더 잘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더 좋은 딸이 되겠다고 말하지 않아도
내 부모님은 딸의 모든 걸 이해해주셨다.
그보다 딸이 가진 서운함도 당신들 잘못이라 여기시는 듯 되려 미안해하셨다.

남편이 잡은 망상어
남편이 잡은 망상어주경심
정월 대보름을 맞아 준비해놓으신 묵은 나물, 오곡밥, 귀밝이술에 쌓였던 서운함 툭툭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삼일 저녁을 보내고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아침에 "비도 오는디 먼 길을 어찌 갈꺼나?"하는 부모로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자식 근심만을 두 분께 남긴 채 다시 고향집을 떠나왔다.

오늘은 하늘이 참 맑다. 묵은 나물로 한해 시름 다 털어내는 정월 대보름처럼 내 마음에도 묵은 숙제 털어낸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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