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흐른다. 4> 책 표지청년사
유럽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닫힌 사회였다. 신대륙 발견 이후 아주 짧은 기간에 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했으며, 넓은 세계로의 진출은 유럽 내부 상황도 변화시켰다. 교황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던 유럽은 1571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이유로 종교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종교개혁은 곧 온 유럽에 퍼져나갔고 유럽인들은 동질감을 잃고 급기야 종교전쟁까지 일어나고 만다.
종교개혁은 여러 분야에 영향읠 미쳤는데, 예정설을 근거로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영주들은 힘을 키울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되었다. 또, 상업이나 금융업을 신성시하고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움직임에 맞서 가톨릭 진영에서도 개혁이 일어난다.
식민지와 교류가 늘어나면서 대서양 연안에 있는 항구들이 발전한다. 비교적 종교전쟁의 피해가 적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이 빨리 나라를 안정시켰다. 덕분에 유럽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는 대서양 연안으로 옮겨졌다. 학문 풍토가 바뀌면서 과학연구가 지식인들의 유행처럼 번졌다. 재산이 넉넉한 지주나 상인, 법률가 출신들이 학문연구의 주류로 등장한다. 르네상스 시대엔 대학이 학문의 중심지였으나 이 시기엔 학회나 학술원이 학문 논의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학문의 특징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는 점과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는 시대의 변화에 발 맞추는 과정으로 공동체나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주의적 생각들을 형성해 간다. 이 것은 데카르트 같은 인물을 통해 ‘생각하는 나’라는 인식론적 자연주의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컨 - 경험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과학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베이컨(1561~1626)와 데카르트(1596~1650)는 철학이 과학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다. 그 첫걸음으로 근대과학의 방법적 토대를 마련하던 두 사람은 실험과학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이며 대립한다.
경험을 중시 했던 베이컨은 여러 가지 사례들을 모은 다음, 가설을 만들고 실험을 걸쳐, 버릴 것은 버리고 남은 것들은 더욱 세밀히 연구하여 과학지식을 얻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지식의 사다리’라고 4가지 기본 원칙을 정하게 된다.
4가지 원칙은 자료를 모으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라는 종족으로 다른 종족을 바라 볼 때 생기는 편견을 말한다. 둘째, ‘동굴의 우상’ 개인의 특수한 상황이나 환경에서 생기는 잘못된 판단을 일컫는다. 셋째, ‘시장의 우상’ 검증되지 않은 얘기들이 힘을 얻어 진짜처럼 들리는 데서 생기는 편견. 넷째는 ‘극장의 우상’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짜 일어난 일로 생각하게 되는 돼서 오는 편견이다.
경험론적 출발은 지금까지 숭배해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반박하면서 시작한다. 학문의 논증에 있어서 연역적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고 귀납법의 논증구조 택했다. 그러나 귀납법은 경험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에는 장점이 있지만, 실험을 하기 위해선 연역적 추론과 가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현대 과학에서는 이 둘을 모두 쓰고 있다. 그러나 베이컨의 귀납법은 19세기 들어 수많은 연구 자료를 정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베이컨은 효과적인 과학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왕립 학회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데카르트 - 합리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과학
베이컨과는 달리 데카르트는 연역법의 단점을 보안하여 취했다. 확실한 전제를 얻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고안하여 과학현상들을 설명했다. ‘방법적 회의’는 의심이 여지가 있는 것은 모두 제외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회의적 방법론은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연역법의 출발점을 삼았다. 따라서 정신의 존재와 신이 창조한 자연 세계의 존재를 각각 독립시켜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 데카르트는, 물질세계는 정신과 상관없이 존재하며 이성적 능력으로 신이 주신 물리법칙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계적 세계관은 몇몇 물리법칙들을 이끌어냈고 인간과 동물에 적용했으며 새로운 우주관을 세우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 ‘운동량 보존의 법칙’이고 ‘관성의 법칙’이다.
기계론을 바탕으로 세운 물질관은 학문의 우선순위를 바꿔 놓았다. 신이 주신 물질은 똑같은 자연법칙에 지배받는 기계일 뿐이라, ‘자연에 동물혼, 식물혼, 이성혼은 같은 게 있고 거기에 계급이 있다’라는 스콜라철학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덕분에 과학은 신학에서 분리 될 수 있었으며 과학계는 변할 수 있었다. 베이컨의 경험론과 데카르트 합리론의 논쟁은 100년간 계속되었는데, 뉴턴이 나타나 이 두 이론을 모두 수용한다.
학회의 성립
17세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대학을 차지했기 때문에, 과학혁명을 추진하던 과학자들은 학회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상공업주와 지주들의 지원 하에 대부분의 학회가 만들어졌고 왕립 학회는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실용산업만 연구해야 했다. 이것은 영국 산업혁명의 원동력으로 전개 된다.
프랑스 학회는 왕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다. 이 두 나라는 학회의 연구 성과를 서로 교류하면서 여러 가지 실험기구들을 발명하였다.
17세기의 천문학
17세기에 강세를 보였던 과학 분야는 천문학이다. 티코 브라헤는 치밀한 관측을 통해 수많은 자료들을 만들었다. 그 결과 천동설과 지동설의 사이에서 절충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를 신봉했으나 신비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를 도와 관측 자료들을 정리했다. 그러나 케플러의 연구 성과물을 수학적으로 너무 어렵게 설명했기 때문에 일반화하지 못했다. 반면 갈릴레이는 태양중심설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손쉽게 증명해 낸 덕분에, 지동설에 관련된 모든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과학은 흐른다 5 - 17~18세기 과학혁명 2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