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압박 때문에 8천억원 내놨다?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조선일보>의 의혹 제기에 난처한 삼성

등록 2006.02.22 10:37수정 2006.02.2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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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개 숙인 삼성...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등 그룹내 수뇌부들이 7일 삼성그룹 본사에서 기자회견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인주 구조본부사장, 배정충 삼성생명사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이상배 삼성물산 건설사장, 이종왕 법무실장.

고개 숙인 삼성...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등 그룹내 수뇌부들이 7일 삼성그룹 본사에서 기자회견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인주 구조본부사장, 배정충 삼성생명사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이상배 삼성물산 건설사장, 이종왕 법무실장. ⓒ 연합뉴스 백승렬

삼성의 바람대로 '논의'가 시작됐다. 이건희 회장 일가가 내놓기로 한 8000억 원 운용방안에 대한 논의다. 삼성은 지난 7일 8000억 원을 헌납하겠다며 그 운용방안을 "국가와 사회의 논의에 맡긴다"고 했다.

논의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20일 "소모적 논란 방지를 위해 정부가 나서 과정과 절차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상은 거꾸로 전개됐다. 노 대통령의 이 말로 인해 '논의'는 '논란'으로 변질됐다. <조선일보>는 "정부 마음대로 쓰려고 삼성 압박한 것 아닌가"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청와대가 작년 가을부터 수차례에 걸쳐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 뒤 8000억 헌납 방안이 나왔다는 점이 의혹 제기의 근거다. 삼성이 청와대의 압박에 굴복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다.

<조선일보>의 추정대로라면 앞뒤가 맞는다. 청와대의 압박에 굴복한 삼성이 돈을 내놓으며 그 운용방안을 "국가와 사회의 논의"에 맡긴다. 하지만 '사회'는 실체가 없다. 결국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연스레 대통령이 삼성의 논의 요구를 받는다….

잘 짜여진 상황극 같지만 검증할 것도 많다. <조선일보>가 청와대의 압박 사례로 열거한 것들 중 연관성이 매우 부족한 것도 적잖다. "(기업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의제를 설정하고 고민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노 대통령의 지난해 12월 28일 발언이 그 예다. 노 대통령이 이 말을 한 곳은 경제계 인사들과 자리를 가진 국민경제 자문회의다. 보기에 따라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원론적으로 강조한 말로 받아들일 소지도 다분하다.

검증이 필요하지만 쉽지 않다. <조선일보>의 근거는 모두가 노 대통령의 말이다. 노 대통령이 삼성에게 "돈 내놔"라고 직접 요구한 것이 아닌 이상 노 대통령의 말은 방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압박'과 '순종'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양측간에 별도의 소통행위가 있었다 해도 그건 무대 뒤편에서 은밀히 이뤄졌을 것이기에 추적이 쉽지 않다.

청와대가 8천억 출연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a 지난 4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지난 4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러니까 이번에는 <조선일보>가 인도하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자. 이 글의 관심사는 <조선일보>의 논리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추정이 맞다면 8000억 원 헌납 사실은 달리 봐야 한다. 삼성이 헌납 방안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초점은 돈의 규모에 맞춰져 있었다. 말이 8000억 원이지 이중 4500억 원은 이미 이건희 장학재단에 출연한 돈이고, 1300억 원은 이건희 회장 자녀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등으로 거둬들인 돈의 1/10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던 차에 <조선일보>가 새 문제를 짚어볼 계기를 마련했다. 바로 순수성과 진정성이다.

<조선일보>의 추정을 그대로 따라가면 이전의 추정은 폐지돼야 한다. 삼성이 X파일과 소유구조 문제 등으로 심화된 국민의 '반삼성 정서'를 무마하기 위해 8000억 원 헌납 카드를 꺼냈다는 추정은 폐지돼야 한다. 그 자리에 청와대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 돈을 내놨다는 추정이 들어서야 한다. 삼성이 추상적인 국민권력은 뒷전으로 제쳐놓고 살아있는 권력을 우선시 했다는 추정 말이다.

이 추정이 너무 과하다면 이렇게 수정해도 된다. 삼성이 국민의 '반삼성 정서'도 달래고, 살아있는 권력에도 성의를 보이는 '꽃놀이패'를 흔들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선일보>는 이런 파생 추정을 거론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의 평가를 내놓았다. "(삼성이) 모처럼 큰맘 먹고 헌납한", "세계 기부사에 남을 만한 거액"이란다. 그래서 정부가 아니라 삼성이 직접 8000억 원 운용 해법을 내놓는 것이 "출연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 길" 이란다.

<조선일보>는 호응하지 않을 것 같은 두 목소리를 각각 '뉴스초점' 면과 사설란을 통해 내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가? 편집국과 논설위원실이 교통사고를 일으킨 건가?

삼성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든 <조선>

아니다. 다른 것 같지만 한 길로 모아지는 목소리다. 두 목소리가 합쳐지는 곳은 청와대다. <조선일보>가 철두철미하게 견제하고자 하는 건 삼성의 의도도, 돈의 규모도 아니다. 청와대가 그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을 제지하겠다는 일념이다.

제기하지 못할 주장은 아니다. 이왕 생긴 돈이면 알뜰살뜰 쓰는 게 옳다. 하지만 주장의 강도에도 급수가 있는 법이다.

청와대는 운용 주체를 찾을 때까지 절차 문제를 도와줄 뿐이며 출연금의 운용 주체는 순수한 민간 조직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청와대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이 사안은 다르다. '분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8000억 원의 활용 방안을 마련하는 데 정부가 나서기로 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한국일보>의 평가를 환기시킬 필요도 없다. <조선일보> 스스로 진단했듯이 노 대통령의 발언을 "최소한의 교통정리" 차원으로 이해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뉴스초점' 면을 털다시피 해서 정부의 '삼성 압박' 의혹을 제기했다. 소 잡는 칼을 들이댄 것이다.

덕분에 삼성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처지에 빠졌다. "세계 기부사에 남을 만한 거액"을 헌납한 기업으로 칭송을 받나 했더니 '알아서 기는' 기업 이미지가 뒤통수를 때린다. 어쩔 것인가? 이럴 때일수록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최소한 절반의 성공은 거두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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