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핵문제와 관련하여 한국 내부에는 여러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핵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기만 하면, 통일의 여건이 자연스럽게 조성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속에는 '통일은 당연히 한국 주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핵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면, 통일을 위한 우호적인 여건이 조성될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한국 주도의 통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일부의 기대감은 문자 그대로 '막연한 기대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막연한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누가 주도하든 간에 우리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통일 주도권을 둘러싼 민족 내부의 선의의 경쟁은 통일을 보다 더 빨리 촉진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목과 갈등으로까지 치달으면 안 되겠지만, '적당한 경쟁'은 통일을 촉진시킴과 동시에 민족 내부의 역량을 강화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남북 간 선의의 경쟁은 통일의 촉진제
그러한 선의의 경쟁에서 북한을 제치고 통일 주도권을 확보하려면, 한국은 동북아 질서가 지금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좀 더 면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점에 관하여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시리즈의 1편 기사인 "남북통일보다 '북미통일'이 급선무다"(2월 20일자 기사)에서 검토한 바 있듯이, 지금 동북아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핵심 축은 바로 북·미 핵문제다. 그런데 2편 기사인 "북·미 전쟁시 한국 주도 통일은 불가능"(2월 25일자 기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핵문제가 군사적 방법으로 종결되는 경우에는 통일의 가능성이 반반이며, 설령 통일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북한 주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 북·미 핵문제가 6자회담이라는 틀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경우에는 과연 통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리고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미국의 주장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관철된 상태에서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전자(前者)의 경우는 미국의 승리로 볼 수 있고, 후자(後者)는 북한의 승리로 볼 수 있다.
그럼,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된 경우에 무엇을 기준으로 승부를 판가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북한이 '핵 포기 선언을 하느냐 안 하느냐'다. 다시 말해, 북한이 '핵 포기 선언'을 하는 것을 전제로 양국이 타협하면 그것은 미국의 승리로 볼 수 있고, 북한이 '핵 포기 선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국이 타협하면 그것은 북한의 승리로 볼 수 있다.
'핵 포기 선언' 여부가 관건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누구의 승리인가를 가르는 기준이 '북한의 핵 포기 여부'에 있는 게 아니라 '핵 포기 선언 여부'에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이 실제로 핵 프로그램과 핵무기를 포기하느냐 여부는 문제의 관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을 쉽게 이해하려면, 북·미 양국이 이 문제에 관해 어떤 기본인식을 갖고 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레고리 카로우프의 2000년도 논문인 "소비에트-북한 핵 교류의 기술적 과정"에 의하면, 북한은 이미 1956년부터 소련의 모스크바 공업물리연구소 등에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이들을 핵 전문가로 양성하였다. 그리고 훗날 북한으로 돌아간 이들이 북한 핵 개발의 모체가 되었다.
북한의 핵 개발 과정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권 장악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후광 때문만이 아니라, 그보다는 그 자신이 북한 핵 개발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점은 필자의 번역서를 통해 이미 국내에 소개된 바 있고, 또 원저자인 북측 인사를 통해 미국과 일본에도 소개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논의를 피하기로 한다.
아무튼 북한은 한국전쟁 이래로 핵 개발을 위해 국가적 역량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까지 핵 개발에 심혈을 쏟아 왔다. 북한은 핵 개발을 위해 단순히 경제만 포기한 게 아니다. 핵 개발에 전력을 다하다 보니, 북한은 항공모함이나 원자력 잠수함 같은 것도 갖출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북한이 의지할 수 있는 첨단 군사력이라고 해봐야 '핵' 혹은 '핵 보유가 사실일지 모른다는 국제적 우려'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핵 개발을 위해 경제·군사적으로 사실상 '모든 것'을 포기한 북한에게 있어서는 핵이 곧 주권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처럼 핵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순수한' 발상일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을 꺾지 못하는 한,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그러므로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경우에는 북한이 더 더욱 핵을 포기할 리가 없는 것이다.
미국도 '핵 포기'까지는 언감생심
그리고 미국의 경우에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느냐' 여부는 핵심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미국이 능력이 있어 강제적으로 핵을 제거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라면 미국도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볼 때에도, 미국이 외국의 핵 보유 그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견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 미국이 외국의 핵 보유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아마 이스라엘 같은 나라의 핵 무장도 분명 두려워할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 핵무기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나라라면, 핵문제에 관한 미국의 이중적 기준도 생겼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핵무기는 용인하면서 북한이나 이란의 핵무기는 용인하지 않는 미국을 가리켜 '이중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이중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국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행동은 전혀 모순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이스라엘의 핵무기는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용인하는 것이고, 북한과 이란의 핵은 위협이 되기 때문에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핵이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만 생기면, 미국의 태도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북한 지도부가 기대를 거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에게 핵심적인 관심사는 '북한이 핵을 갖느냐 여부'가 아니라 '북한이 미국에게 어떤 나라가 되느냐'에 있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미국은 얼마든지 북한의 핵을 용인할 것이고, 정반대의 경우에는 군사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끝장'을 내려 할 것이다.
위에서 "북미관계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경우 승자를 가르는 기준이 '핵 포기 여부'가 아니라 '핵 포기 선언 여부'에 있다"고 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핵무장 도미노' 막기 위해서라도 '핵 포기 선언'은 필수
"핵 포기가 북미관계의 관건이 아니라고 하면서, '핵 포기 선언 여부'가 승자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북·미 양국이 '북한 핵무기의 용인'을 전제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경우, 이것은 자칫 한국·일본·대만의 핵무장을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처럼 북한 이외의 다른 동북아 국가들마저 연쇄적으로 핵무장을 선언한다면, 이는 곧 미국의 핵우산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역내(域內) 국가들까지 핵무장을 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북·미 양국은 다소 모호한 개념인 '핵 포기 선언'을 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식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으로 해 둠으로써 '핵무장 도미노'를 임시방편으로나마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북·미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럼, 북한의 핵 포기 선언을 전제로 북·미가 평화적으로 타협하는 경우와, 북한의 핵 포기 선언 없이 북·미가 평화적으로 타협하는 경우에, 한반도 통일과 통일 주도권 문제는 각각 어떻게 되는 것일까?
▲ 북한이 핵 포기 선언을 하는 경우
북한의 핵 포기 선언을 전제로 양국이 평화적 타협을 하는 것은 일단 미국의 승리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미국이 얻는 것은, 동북아 패권국가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경우 미국의 '타이틀 방어'는 상당히 불안정한 것이다.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고는 하지만, 미국이 실제로 북한의 핵을 제거한 것도 아니다. 그저 단순히 핵 포기 선언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체면을 좀 세웠을 뿐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점령군처럼 행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미국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북한을 전략적 파트너로 끌어들이는 것밖에 없다. 북한과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북한과 국교를 수립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양국 간 경제교류에 적극적일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만 북한의 '폭탄선언'(예컨대, 핵 보유 재개 선언)을 방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패권국가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개되는 북미관계는 한미관계와 그 성격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한 뒤이기 때문에, 양국 간의 유대는 급속도로 강화될 수밖에 없다. 사이가 나쁘던 사람들끼리 한번 친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급속도로 친해지는 법이다.
또 북·미가 국교를 수립하게 되면, 양국관계는 대등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종속적인 한미관계와는 또 다른 형태의 북미관계가 수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그 중점이 북한으로 쏠릴 수밖에 없고, 한미관계보다는 북미관계가 더 밀접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미국을 '친구'로 만든 다음에, 북한 지도부는 적극적으로 통일운동에 나서게 될 것이다. 북한 지도부는 '북미관계를 해결해야만 남북관계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기본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미관계가 정상화된 다음부터 적극적으로 통일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통일에 대해서 상당히 적극적인 북한이 세계 최강 미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껴안게 되면, 통일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것이다. '단단히 준비하고 나오는 북한'과 '변심한 미국'을 상대로 한국이 얼마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하겠다.
▲ 북한이 핵 포기 선언을 안 하는 경우
북한의 핵 포기 선언 없이 북·미가 평화적으로 타협하는 경우는 당연히 북한의 승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북한 압박을 목표로 한 4개국(한·중·일·러) 규합에 실패했음이 판명되거나 중동 등 여타 지역에서 극심한 곤경에 빠지는 경우에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 더 이상 동북아정책을 수행할 여력이 없게 되었을 때에 실현될 수 있는 시나리오다.
핵 포기 선언 없이 미국이 물러나는 경우는 '북한이 미국에 대해 군사적 승리를 거둔 경우'(2편 참조)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경우든 간에 미국이 동북아에서 발을 뗀다는 점에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이겼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이 군사력의 손실 없이 미국을 물리쳤다는 점은, 이후 동북아에서 북한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에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상승세는 자연히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로 연결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북·미 핵문제가 군사적으로 해결되든 평화적으로 해결되든 간에 한국이 통일을 주도하기 힘들다는 점은 어느 경우나 다 똑같다. 미국이 군사적 승리를 거둔 경우를 빼고 나머지 세 경우에는 북한 주도의 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핵문제가 평화적 해결 돼도 북한이 통일 주도
그러므로 일부 한국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된다 해도 한국 주도의 통일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통일은 언젠가 한국 주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한국 사회 일각의 기대감이 얼마나 막연하고 또 비과학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정부가 지금의 대외정책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종래의 대외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면, 북·미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든 군사적으로 해결되든 간에 한국은 영원히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은 결코 통일을 주도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공부방법'을 고수하는 한 결코 '1등'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종래의 대외정책에 일대 변화를 기한다면, 판도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경제·군사적으로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는 만큼, 한국도 '공부 방법'(대외정책)만 바꾼다면 얼마든지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 점에 관하여는 제4편에서 계속 논의하기로 한다.
(제4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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