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76회

등록 2006.02.27 08:15수정 2006.02.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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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9 장 흉수색출(兇手索出)

천막 안의 분위기는 숙연하다 못해 침중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회의에는 구양휘와 몽화가 참석해 있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침묵을 구효기가 깨뜨렸다.


“이제 모용가주께서 변명이라도 하셔야 할 것 같소.”

그 말에 서로 눈을 피하며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었던 좌중이 일제히 모용화궁을 주시했다. 좌중의 눈빛에는 이미 모용화궁이 흉수이고 적과 내통하는 자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용화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모든 정황이 그에게 극히 불리했다. 변명을 한다고 의혹을 풀 수 있을까? 자신이 아무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하더라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완벽한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본 가주가.....”

모용화궁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려 있어도 그의 얼굴에는 한점 당황하거나 궁색한 기색이 없었다. 그는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모용가의 가주였다.


“어떠한 말을 한다고 해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어느 분이 믿겠소? 여러분들을 보니 실컷 변명이라도 늘어놓으라는 표정들이구려.”

모용화궁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좌중을 한 사람 한 사람 번갈아 둘러보았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난도질을 당한다 해도 비굴하게 변명을 하거나 머리를 숙이지는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구효기에게 머물렀다.


“본 가주의 대답은 언제나 마찬가지요. 본 가주는 단문주를 죽이지도 않았고, 적과 내통하지도 않았소.”

추호도 흔들림이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구효기는 모용화궁을 마주보며 탄식을 불어냈다.

“휴우.......”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옆에 앉아있는 구양휘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데리고 들어오게나.....”

구양휘가 고개를 끄떡이며 밖을 향해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천막의 휘장이 걷히며 세 사람이 들어왔다. 목득으로 변장한 당중과 광도, 그리고 광도의 왼팔에 이끌려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는 비류지흔(飛琉脂痕) 연자광(燕孜匡)이었다. 광도는 이미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모용화궁은 팔과 손목이 잘리고, 온 몸이 불에 덴 듯 수포로 덮혀 흉측한 몰골의 연자광을 보며 처음으로 암울한 눈빛을 띠었다. 모용화궁 역시 이미 보고받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광도는 연자광을 구효기 옆에 내팽개쳤다. 연자광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웠다. 아마 당일기가 말했던 독에 지독히도 고문을 당한 모습이었다.

“이 자는 모용가의 식솔이오. 그렇지 않소. 모용가주?”

“분명히 그렇소.”

모용화궁이 침음성을 터트리며 무겁게 대답했다. 구효기가 더욱 매섭게 추궁했다.

“이 자는 가주의 명을 받고 혹시나 목득이 누설할까 두려워 입을 막으려 목득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붙잡힌 자요. 이래도 부인하시겠소?”

“본 가주의 대답은 처음과 마찬가지요.”

“이 자가 모든 것을 실토했음에도 말이오?”

“저 놈이 무슨 말을 했건 본 가주의 대답은 한가지요.”

모용화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태도는 매우 당당했다. 너무나 당당해 구효기가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칠결방(七結邦)의 방주인 귀영무도(鬼影霧刀) 진대관(陳大棺)이 조소를 머금으며 비꼬듯 말했다.

“차라리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살려달라고 하면 어떻겠소? 그 간의 정을 보아 가주의 목숨 정도는 소제가 책임지겠소.”

그 순간이었다. 진대관 쪽으로 시선을 홱 돌린 모용화궁의 눈에서 무서운 정광이 쏘아 나왔다. 마치 파란 불꽃이 눈에서 일렁이는 듯 했다.

“입을 닥쳐라. 감히 네까짓 놈에게 능멸당할 본 가주가 아니다! 어찌 지금 칼을 물고 죽는다 해서 네놈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랴!”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진대관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있지도 않은 의리를 내세워 은근히 봐주는 척하는 짓 따위는 오히려 모용화궁을 모욕하는 짓이었다. 욕설을 들은 진대관 역시 눈썹을 꿈틀했지만 여전히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지금 가주의 처지를 알고나 하는 말이오? 이미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는데도 비겁하게 시치미를 떼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고상한 모용가주가 할 짓이란 말이오?”

모용화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꽉 다문 이빨 사이로 분노를 짓이기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한번만 더 지껄인다면 내 검이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라.”

모용화궁은 이미 이십년 전에 무림을 한차례 휩쓸었던 인물. 모용가의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황제검은 무림인 어느 누구라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대관이 무어라 하기 전에 성질 급한 동정채(洞庭寨)의 채주인 철부왕(鐵斧王) 나정강(羅晸康)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 가주는 스스로 무덤을 더 깊이 파고 있음을 모르시오? 진방주의 입을 무력이라도 사용해 틀어막자는 심산이오? 이곳에 계신 분들이 아직 참고 있음은 그 간의 정리 때문인지나 아시오. 본 채주의 철부도 본 맹을 배신한 가주의 피를 그리워하고 있소.”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은 아마 이러한 상황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모용화궁의 얼굴이 붉으레하게 변했다. 그것은 그의 분노를 극도로 참고 있다는 뜻. 모용가의 가주로, 그리고 무림인으로 언제 이러한 모욕을 받아 보았는가? 그의 두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금새라도 피를 뿌릴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흘렀다. 모용화궁의 성품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모욕은 참지 못한다. 구효기가 다시 나섰다.

“모두 잠시 참으시오. 그럼 모용가주께 한 가지 더 묻겠소.”

아마 구효기가 나서지 않았다면 모용화궁은 진대관이나 나정강에게 손을 썼을지 모를 일이었다. 구효기가 나서자 모용화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차갑게 대답했다.

“물어보시오. 어차피 본 가주를 옭아매려는 것이겠지만 대답해 드리겠소.”

“천지회 회주 중 한 명인 모용화천과는 어떤 관계요?”

“으음......”

모용화궁은 침음성을 터트렸다. 결국 그것이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지고가야 할 일이었다. 구효기가 다시 다그쳤다.

“가주도 이미 알고 있다시피 현 무림을 감싸고 있는 음모가 모두 모용화천으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믿을만한 정보가 있소. 이곳 천마곡도 그와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소. 따라서 가주가 그와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면 누명을 벗기 힘들 거요.”

“이미 다들 짐작은 하고 계시지 않소?”

“무림의 소문이란 왕왕 와전되게 마련이오. 가주께 직접 듣고 싶소.”

모용화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을.... 허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모용가의 가주로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소. 모용화천이란 인물은 본 가와 아무런 관계도 없고, 본 가주와도 전혀 관계가 없소.”

좌중의 얼굴에 이미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차피 믿지 않을 것이란 모용화궁의 예상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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