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다 해놓고 오해하지 말라고?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노 대통령 발언서 개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

등록 2006.02.27 10:41수정 2006.02.2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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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3주년이 하루지난 26일 출입기자단과 함께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등산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승렬

난감하다.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개헌과 연결된 1%의 의도도 없었다"고 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개헌과 연결시켜 기사가 나가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엄포를 놨단다. 그저 소회를 피력한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게 말했다. "(개헌에) 국정 우선순위를 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정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대통령의 영역을 벗어난 것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발언을 개헌과 연결 짓지 않을 수 없다. "법적 대응" 엄포에 주눅 들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너무 구체적이다.

노 대통령은 "임기 5년이 너무 긴 것 같다"며 "개인적 느낌도 그렇지만 제도적으로도 길다"고 했다. 임기 중간에 선거 같은 것을 하지 말고 평가와 심판을 한꺼번에 모아서 진퇴로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도 했다. 종합하면 대선과 총선을 일치시킨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뜻하는 발언이다.

'구체 발언'과 '극력 부인'이 충돌하는 현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선 걸러내자. 대통령의 말 중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대통령의 영역을 벗어난 것 같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현 정권 임기 하에서는 어떤 개헌 논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이라면 개헌은 대통령의 영역을 벗어난 게 틀림없다. 한나라당의 동참 없이 개헌 선인 국회 의석 2/3 확보는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영역을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정치권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발언을 '포기한 소망'을 회고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읽고 나니까 의아해진다. 칼을 꺼냈으면 과일이라도 깎는 게 노 대통령의 스타일이다. 예가 하나 있다.

대통령 발언, 포기한 소망을 회고한 것?

노 대통령은 어제 '국민여러분에게 드리는 편지'를 통해 준비가 채 되기도 전에 언론에 의해 공개된 게 바로 대연정 구상이었다고 밝혔다. 국민과 열린우리당을 설득해 보려던 차에 대연정 보도가 터졌다는 것이다. 상황이 그러했다면 숨을 고를 법도 했건만 노 대통령은 거꾸로 발걸음을 뗐다. 걸은 게 아니라 뛰었다. 이왕 내친걸음이라고 판단해 가속도를 붙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랬다. 가야 할 길이라면 좌우 둘러보지 않고 달렸다. 그랬던 노 대통령이 이번에는 "정치상황"을 이유로 걸음을 떼지 않겠다고 했다.

바뀐 것일까? 대연정 제안으로 자신이 "많은 상처를 입었고", "국민들에게도 대통령으로서 많은 신뢰 훼손을 끼쳐 드렸"다는 책망감이 너무 컸던 것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앞뒤 상황이 맞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2006년에 개헌 논의를 시작하는 정치일정표를 제시한 바 있다. 당시 의석 분포를 보면 노 대통령 당선자가 소속된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30여석 모자란 원내 2당이었다. 당시는 탄핵 카드를 통한 전세 역전을 예감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비록 과반 의석은 무너졌다 해도 엄연한 원내 1당이다.

그 뿐인가. 비록 이재오 원내대표가 선을 긋긴 했지만 한나라당 소속 의원 상당수는 아직도 87년 헌법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고,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에 대해 '동의'를 표하는 의원도 적지 않다는 게 언론 보도다.

대연정 제안 때 내보인 '못 먹어도 고' 스타일을 거둬들일 만큼 '정치상황'이 악성은 아니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정치상황'을 들어 "대통령의 영역을 벗어난 것 같다"고 했다. 상당수 언론이 청와대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의 '속내'를 둘러싼 논란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두 대목을 마저 살펴야 한다.

노 대통령과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이해찬 총리는 지난 22일 국회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개헌 필요성을 거론했다. 이 총리는 개헌 필요성을 묻는 이기우 열린우리당 의원 질문에 답하면서 "(2007년 대선 전에 개헌하지 않으면) 또 넘어간다"며 "이제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정비할 때가 됐다"고 밝혔다.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갖고는 국정의 안정적 운영에 대단히 한계가 있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느껴진다"고도 했다.

개헌, 총리는 "필요하다"하고 대통령은 "영역 벗어난 것 같다"하고...

노 대통령이 말하기 나흘 전에 노 대통령과 거의 같은 맥락의 문제의식을 피력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다. 거의 똑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한 사람은 "필요하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대통령의 영역을 벗어난 것 같다"고 말했을까?

바로 이 점 때문에 또 하나의 대목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개헌을 하지 말자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대통령의 영역을 벗어난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방점을 찍어야 할 다른 말이 있다. "앞으로 정치권이나 시민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해 사회적 공론이 되면 저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제가 먼저 개헌문제를 들고 나갈 생각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 말에 방점을 찍으면 노 대통령의 말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개헌 필요성은 충분하지만 대통령이 나설 경우 정략을 둘러싸고 공론(空論)이 판칠 수 있으니까 정치권이나 시민사회가 먼저 공론(公論)을 시작하는 게 생산적이라는 뜻 말이다.

노 대통령이 이렇게 판단해 행동한다면 "현 정권 임기 하에서는 어떤 개헌 논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재오 원내대표의 태도도 비껴갈 수 있다. 개헌 카드를 선거에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 개헌카드로 차기 대권주자들의 경쟁을 유도해 레임덕을 막으려 한다는 의심을 희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 노 대통령의 판단과 이재오 원내대표의 태도가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판단할 필요는 없다. 개헌은 대통령이나 야당 원내대표가 판단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건 전적으로 국민이 국가운영 대계를 짜는 관점에서 논의할 문제다. 대통령이나 야당 원내대표의 말은 개헌 총론을 구성하는 부분적인 각론일 뿐이다. 중요한 건 지금 시점에 개헌이 필요한가에 대한 국민 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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