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
그 여정은 어떤 거창한 뜻을 세우고 시작한 것도 아니요, 다만 우리 국토를 그것도 강을 따라 일어났던 문화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그 길 위에서 다시 한 번 나를 뼈저리게 뒤돌아보고 싶어서 출발한 걸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 걷기를 다 마친 지금 어떤 응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반짝이는 강물에서 깨달음의 묵상을 추구하던 헤세의 <싯달타>가 잠시 되어보는 것도 같다. 나아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까닭모를 어떤 뿌듯함이 느껴온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보폭에서 느껴보지 못한 다른 어떤 것이며, 앞으로를 살아가는데 또한 세상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크나큰 폭과 깊이를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우리 국토를 따라 한 번 걸어보라고, 더러는 우리의 강을 따라 하루쯤 뼈마디가 노곤하도록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다"라는 이상의 시구가 이 시간 귓가에서 쟁글쟁글하다.
그 아무런 구애 없이 흘러가는 강은 가는 길에 수많은 실개천과 또 다른 강을 품고 흘렀으며 형식에 구애받지도, 규격에 얽매이지도 않고 자유로웠다. 가는 길에 몇 개의 다른 강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흘러가는 장쾌한 폼이 마치 한 편의 거대 서사시나 수필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도 강을 일컬어 "언제 어느 때에도 같은 존재이며, 또한 각각이 새로운 존재"라고 했는가 보다. 그 여정이 어느 덧 4계절이 지나 천지에 두껍게 눈이 덮인 이 겨울 날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지리산 설해목의 발치에서 자라나고 있을, 수줍움 잘 타는 새싹들을 생각하며 또 다른 출발을 기대해 본다.
그 길에서 나는 눈 속에 얼굴을 붉히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보았으며, 여름땡볕 아래 길가에 쓰러진 앵두나무와, 지천으로 열려있던 오디도 보았다. 한 번 훑으면 진저리를 치듯 붉은 빛을 토해내며 앵겨오던 그 열매들. 담벼락마다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우리의 여정에 피로를 풀어주던 그 달디 단 오디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그것들은 새까맣게 익어가다 못해 짓물리고 있었으며, 길가에 쓰러진 앵두나무 곁을 지날 때에는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고, 입이 새빨개지도록 그것들을 따먹었다.
강 따라 마을 따라 널려있던 산딸기들도 실컷 먹었으며, 우리의 산하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열매와 풀꽃들도 너무나도 많이 피어 있었다. 매연을 뒤집어쓰고 힘겹게 서있던 나무들, 그 나무들을 타고 오르던 하수오(何首烏), 우리는 그 옆에 달라붙어서 그것을 털다가 후후 불면서 머리 위의 하늘에 수백 송이 눈송이를 만들어 놓고 깔깔대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