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천3백리, 그 비원을 따라 걷다

태백산 검룡소에서 김포 보구곶까지

등록 2006.02.28 17:33수정 2006.02.2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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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여
가서 가서 쉼 없는 자여
한 번 가서 돌아옴이 없는 자여
즐거이 즐거이 노래하며 가는 자여
한 번 가서 마침내 뉘우침이 없는 자여…
청마 유치환의 <영원과 사랑의 단장>중에서


아직도 잔설이 가시지 않은 강원도 태백의 4월. 대덕산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따라 걷기 시작한 1300리 길의 대장정이, 서해바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김포 보구곶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소복히 눈 쌓인 그 마지막 길에서는, 가는 곳마다 우리의 발길을 막은 철조망과 초병들로 인하여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으나, 사람이 지나간 곳에는 그 파문처럼 어김없이 길이 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으로 깊이 뿌리박혀 잊고 있었던 분단의 현장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윤재훈
그 여정은 어떤 거창한 뜻을 세우고 시작한 것도 아니요, 다만 우리 국토를 그것도 강을 따라 일어났던 문화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그 길 위에서 다시 한 번 나를 뼈저리게 뒤돌아보고 싶어서 출발한 걸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 걷기를 다 마친 지금 어떤 응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반짝이는 강물에서 깨달음의 묵상을 추구하던 헤세의 <싯달타>가 잠시 되어보는 것도 같다. 나아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까닭모를 어떤 뿌듯함이 느껴온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보폭에서 느껴보지 못한 다른 어떤 것이며, 앞으로를 살아가는데 또한 세상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크나큰 폭과 깊이를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우리 국토를 따라 한 번 걸어보라고, 더러는 우리의 강을 따라 하루쯤 뼈마디가 노곤하도록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다"라는 이상의 시구가 이 시간 귓가에서 쟁글쟁글하다.

그 아무런 구애 없이 흘러가는 강은 가는 길에 수많은 실개천과 또 다른 강을 품고 흘렀으며 형식에 구애받지도, 규격에 얽매이지도 않고 자유로웠다. 가는 길에 몇 개의 다른 강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흘러가는 장쾌한 폼이 마치 한 편의 거대 서사시나 수필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도 강을 일컬어 "언제 어느 때에도 같은 존재이며, 또한 각각이 새로운 존재"라고 했는가 보다. 그 여정이 어느 덧 4계절이 지나 천지에 두껍게 눈이 덮인 이 겨울 날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지리산 설해목의 발치에서 자라나고 있을, 수줍움 잘 타는 새싹들을 생각하며 또 다른 출발을 기대해 본다.

그 길에서 나는 눈 속에 얼굴을 붉히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보았으며, 여름땡볕 아래 길가에 쓰러진 앵두나무와, 지천으로 열려있던 오디도 보았다. 한 번 훑으면 진저리를 치듯 붉은 빛을 토해내며 앵겨오던 그 열매들. 담벼락마다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우리의 여정에 피로를 풀어주던 그 달디 단 오디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그것들은 새까맣게 익어가다 못해 짓물리고 있었으며, 길가에 쓰러진 앵두나무 곁을 지날 때에는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고, 입이 새빨개지도록 그것들을 따먹었다.


강 따라 마을 따라 널려있던 산딸기들도 실컷 먹었으며, 우리의 산하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열매와 풀꽃들도 너무나도 많이 피어 있었다. 매연을 뒤집어쓰고 힘겹게 서있던 나무들, 그 나무들을 타고 오르던 하수오(何首烏), 우리는 그 옆에 달라붙어서 그것을 털다가 후후 불면서 머리 위의 하늘에 수백 송이 눈송이를 만들어 놓고 깔깔대며 웃었다.

윤재훈
남한강 가를 지날 때는 그 꽃송이에 정신이 팔려 아스팔트의 높은 턱에 그만 발을 심하게 삐어 병원에 갔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길에는 차만 다니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위험스레 길가를 타고 가다보면 마무리 되어있지 않는 도로는 곳곳이 발목 지뢰투성이였으며,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도로공사와 지자체들을 원망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넓은 그늘을 늘이고 서있는 당산나무 아래에는 노인들 몇 분 장기를 두시고, 아이들은 나무 아래를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녔다. 그 마을을 돌아 나오는 신작로에서는 매미들이 신나게 울어댔으며, 저수지 곁 능수나무 아래에서 잠시 여장을 풀기도 했다. 아직도 그 강가에는 후덕한 인심들이 남아 있었으며, 매미소리를 따라 잠자리를 따라, 다리를 건너고 산을 넘었다. 마을 앞 강가를 지날 때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가, 천렵을 하거나 서로에게 물장구를 치며 아이들처럼 놀았다.

인적이 사라진 그곳에는 덩달아 사람들이 다니던 길도 같이 없어졌으며, 우리는 풀섶을 헤치고 가시덤불도 지나갔다. 허리까지 빠지는 미끄러운 강심을 서로에게 의지하고 건너갔으며, 사라진 강 속의 길을 물으면 건너편 강가에서 앉아있던 나이 많은 연인들이, 강심까지 텀벙텀벙 뛰어 들어와 그 길을 일러주고 나갔다. 길도 없는 길을 헤치며 때로는 위험한 배수로를 올라가려다가 벌집을 건드려 혼비백산했던 일들, 모든 기억들이 이제는 다들 정답기만 하다. 그때 보았던 동강의 그 구름들은 아직까지 그대로 흘러가고 있을까? 그 길을 동행했던 사람들 하나하나는 이제 모두 현실 속으로 돌아갔지만, 못내 정겹고 다들 벌써 그립기만 하다.

윤재훈
남한강을 지나올 때 보았던 그 수많은 폐사지와 마애불들. 옛날에는 그 강가에 100여개의 사찰이 있었다는데 그 큰 규모의 폐사지 마다에는 가을 햇살만 졸고 있었다. 여기저기 쓸쓸하게 뒹굴고 있는 국보와 보물들. 들풀들 옆에서 젖은 몸을 말리고 있는 탑신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기저기 박혀있던 기왓장들만이 천 년의 서러운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부시시부시시 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강가를 따라 조금이라도 넓은 암반이 있으면 마애불(磨崖佛)들이 은은히 웃고 있었으며, 달비를 달았음직한 나무들은 쭈빗쭈빗 강가로 가지들을 드러내며 마치 자기들을 보아달라고 서로 손을 드는 것만 같았다. 그 미소 짓는 얼굴들을 보고 수많은 뗏꾼들은 두 손을 모았을 것이고, 그 아내와 아이들은 날마다 나와 무사귀환을 빌었을 것이다.

등꼬꾸라질 여울, 된꼬까리 여울, 황새 여울, 어느 한 곳 그들의 눈길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이고, 그 수많은 여울들을 헤치고 지나 그들은 도성(都城)에 어렵게 도착했을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그들은 널려있는 주막집에서 술잔을 기울였을 테고, 더러는 번 논을 작파하거나, 험한 여울 어디쯤에서 건너가지 못한 이도 있었으리라. 집에서 임신한 아내는 아이하나 데리고 날마다 한(恨)처럼 길게 뻗은 강을 눈멀도록 바라보았을 것이고.

우리는 가을 서리를 맞으며 도성에 입성할 수 있었고, 25개의 한강다리를 지나 그 종착지를 향해 치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몇 개의 검문소를 요행히, 힘겹게 지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우리 땅을 걸을 수가 없었다. 안돼요 안돼, 만을 연신 로봇처럼 남발하며 손은 휘젓는 젊은 초병에게 가로막혀 더는 그 땅을 갈 수가 없었다. 몇 번 무전기를 쳐보고는 기다리라는 대답 밖에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윤재훈
벌써 50여년이 더 지났지만 상흔의 한강(恨江)을 우리는 그곳에서 가슴 시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한강을 옆에 두고 우리는 한(恨)없이 ㄷ자로 돌아가야만 했다. 철망 밖에는 천둥오리 떼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며, 둔덕 길섶을 지날 때마다 푸드덩 푸드덩 철새들은 철조망을 넘어 날아갔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둥그런 볏단만이 흰눈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마치 날을 벼린 선비의 모습으로 묵상에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몇 군데의 여정은 포기해야만 했다. 철망을 치고 날선 눈으로 막은 우리의 젊은 군인들 때문에. 어찌되었건 우리는 "보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강은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가"라고 노래를 불렀던 니체의 바램처럼 그렇게 12월의 서해바다, 보구곶에 도착했다. 청미천, 섬강, 두물머리 등 수많은 합수지점과 포구(浦口)를 지난 한강의 물은 교하(交河)에서 이제 임진강물과 합쳐 더 큰 소용돌이를 만들며, 기쁨에 떨 듯 급하게 황해로 찾아들고 있었다. 오전에 왔을 때에는 올라가지 못한다는 초병과의 실랑이도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마지막 종착지인 애기봉(愛妓峯)에는 간신히 오를 수가 있었다.

9개월의 장정 끝에 오른 그 서해바다 너머에는 멀리 개성 송악산이 잡힐 듯이 다가와 있었으며, 선전마을과 우리들의 북녘산하, 해안들이 앞마당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보구곶과 유도, 아직 바람 끝이 매서운 봄날 출발한 우리의 여정은, 칼날 같은 겨울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마무리 지을 수가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저 멀리 북녘산하가 칭얼대는 아이처럼 자꾸 눈 앞에 어른거렸으며, 그 풍경을 뒤로하고 한 사나흘 그 보구곶에 머물고 싶었다. 내려오다 보니 엄마를 잃었는지 먹이를 찾아 내려온 노루 한 마리, 가르마처럼 나있는 논길 사이로 급하게 뛰어갔다. 그 세찬바람 속에 애기(愛妓)도 아직까지 그 능선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윤재훈
불타여!
길을 가는 나그네가
목적지에 이르고 안 이르고 상관없이
저는 다만 길을 가르쳐 주면 되지 않습니까?

못가라아니여!
나도 역시 마찬가지다.
분명히 열반은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고,
또 그 길을 교섭하는 나도 있건만…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다니기를 원하면 거기에는 길이 생긴다.

덧붙이는 글 | * 2005년 4월 부터 2006년 1월까지 태백산 검룡소에서 김포 보구곶까지 한강을 따라 여행한 기록입니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4월 부터 2006년 1월까지 태백산 검룡소에서 김포 보구곶까지 한강을 따라 여행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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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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