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처방전을 쓰는 여자

정혜신의 <삼색공감>을 읽고

등록 2006.03.11 16:31수정 2006.03.1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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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글은 쉽게 읽힌다. 간명한 용어설명, 호흡이 짧은 문장, 적절한 상황 대비, 시의성 등 좋은 글의 요건을 대부분 갖췄다.

어떤 목사의 푸념을 들어보자. "요즘 서울에는 한 집 건너 교회다. 포화 상태라 더 이상 서울에서는 교회설립이 어렵다." 이게 1950년대 얘기라면 믿어지는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얘기다. 그렇다. 때로 인간의 인식이나 판단은 어이없을 만큼 허술하고 근시안적이다.

이런 식이다. '세대갈등 오버하지 말자' 편에 나오는 이 글만으로도 전체 내용은 쉽게 그려진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칼럼에 어떤 원칙이란 없지만 그에게는 원칙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의 의식 지형도를 보여주는 대목을 보자.

근본 원인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수'와 '대증요법'은 닮은꼴이다. 우리가 보수성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정혜신 '삼색공감'중 152p 위험한 닮은 꼴, 보수와 대증요법


사상검증은 아니지만 그의 지향점이 어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글이 현상을 분석하고 아울러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어 여러 요소를 고려하면서 다각적인 시각으로 사안에 접근하는 것도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머리 위아래에 한 쌍씩의 겹눈이 붙어있는 '물맴'이 물위에서 공격하는 천적과 물속에 있는 먹이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고 책에서 소개했듯('겹눈으로 세상보기') 그 역시 이런 유연함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모든 글이 그렇진 않지만 그의 서술형식을 복기해보면 대략 이렇다.

1. 시의성 있는 사건을 서두에 둔다.
2. 이와 관련된 정신분석학 용어를 가져와 견줘본다.
3. 자신의 주장을 환치시킨다.
4. 다시금 서두에 언급한 시사를 환기시키며 글을 맺는다.'

소위 논술 수업에서 잘된 글의 전형같다.

그는 책에서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순간 해결책이 나온다'는 생각에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고 했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아닌 것 같다.

디테일 면에서도 공감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용어설명이 단연 눈길을 끈다. 그는 어려운 정신분석학 용어도 생활 속에서 끌어오거나 구체적 사건, 사고에서 퍼올려 생생함을 전하는 능력이 있다.

'역공포반응(counter-phobic reaction)'을 설명할 때 '남자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직장 내 남자 동료들과 장난삼아 목조르고, 머리를 쓰다듬는 등의 오버'를 하는 것이라거나, '동조(conformity)'란 개념을 설명하면서 벤처 열풍 때 이직한 동료들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을 환치하는 식이다.

다만 정신과 전문의라는 이력 때문인지 사회현상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에 신뢰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 전반이 병들었을 것이란 전제에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저자도 이를 걱정했는지 책의 서두에 '개별성 안에 보편성이 있다'는 요지의 글을 남겨뒀다. 정신과 의사로서 바라보는 사회의 '개별성'이 그에게는 '타인이나 세상과 소통하는 삶의 최소단위'라는 것이다. 사회 현상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다는 '개별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 사회는 병들었다'는 식의 선언문적인 단정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게다가 사안마다 꼬박꼬박 처방전을 제시하니 우리가 할 일이란 그의 말을 묵묵히 따르거나 다른 의사를 찾거나 무시하거나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어떡하랴? 그의 처방전을 무시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물을 흐리고 있음을 알아버렸는데. 또 어떡하랴? 그의 책을 덮고 나면 당장 어떤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처럼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을. 지금 이렇게 자판을 부여잡고 있는 것처럼.

삼색 공감 - 사람, 관계, 세상에 관한 단상들

정혜신 지음,
개마고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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