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껏 즐기자, 그러나 오버는 말자

[뉴스가이드] '대한민국 야구'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등록 2006.03.17 09:16수정 2006.03.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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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시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리그 한국 대 일본전에서 2대 1로 승리한 한국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를 든 채로 운동장을 돌면서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1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시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리그 한국 대 일본전에서 2대 1로 승리한 한국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를 든 채로 운동장을 돌면서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김주성
팍팍하게 굴 일은 아니다. 즐겨야 할 땐 맘껏 즐기는 게 좋다. 민생 파탄에 정치 혼란에 강국 괄시에 가슴에 켜켜이 스트레스 쌓아던 차에 날아온 승전보다. 통쾌한 기분을 만끽하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도 선은 넘지 말자. 즐기되 호들갑은 떨지 말자. 환희가 지나치면 도취가 된다. 우려하는 건 바로 이 점이다.

감탄사로는 모자라 경탄사를 보낼 만하다. WBC에서 보여주는 우리 팀의 경기력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누구도 연출하지 않았건만 경기외적 요소에서도 경탄할 만한 장면이 속출하고 있다.

'30년 망언'을 늘어놓은 이치로는 "야구 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날"이라고 했다. 이로써 어느 네티즌 말대로 이치로는 '입치료'가 됐고 일본의 콧대는 꺾였다. 4강에서 탈락할까봐 노심초사하던 미국은 "생큐 코리아"를 연발하고 있다. 우리 팀이 포르투갈을 눌러 미국의 16강행을 도왔던 2002년 월드컵의 재연이다.

각본없는 드라마는 서재응 선수가 에인절 스타디움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고, 이종범 선수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절정에 도달했다.

이종범이 이치로 눌렀지만, 지금도 할머니들의 손수건은...

이 장면들은 중심의 오만과 변방의 설움이 위치 교차하면서 연출되는 드라마다. 그래서 극적이고 통쾌하다. 국민도 감정을 이입한다. 변방의 설움을 느낀 사람이 어찌 야구 선수뿐이겠는가.


이해한다. 하지만 위험하다. 스포츠에 정치색을 입히려는 조짐이 나타난다. '대한민국 야구'를 '대한민국'으로 등치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컨텐츠는 덜 익은 애국주의다.

이런 경우다. <한국일보>는 만사 제쳐놓고 이종범의 "한국이 자랑스럽다"와 이치로의 "가장 굴욕적인 날"을 제목으로 올렸다. <경향신문>은 "기적이 아니다, 한국의 힘이다"라고 외쳤다. <조선일보>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진정 자랑스러운 하루였다"고 했다.


이어가자. '대한민국 야구'를 '대한민국'에 등치시키려는 시도가 위험하다는 건 <조선일보>가 사전에서 길어 올린 한 단어에 압축돼 있다. '하루'다. 어제 하루는 자랑스러웠는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하루하루는 그렇지 않다.

4년 전 '세계 4강 대한민국'에 환호하고 있을 때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여중생 두 명이 미군의 장갑차에 압사당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여중생의 비명은 축구 4강의 환호성에 묻혀 신음하다가 월드컵이 끝나고서야 볼륨업이 됐다.

그로부터 4년, 야구 4강에 환호하는 이 와중에 미군기지가 옮겨갈 경기 평택 대추리에서는 연일 격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주민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내 땅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하지만 국방부는 굴착기를 동원해 논을 갈아엎고 있다.

4년 전엔 '대한민국 축구'가 4년 후엔 '대한민국 야구'가 미국을 구했지만, '대한민국'의 처지는 변한 게 별로 없다.

"이제 그냥 즐겼으면 좋겠다"

4년 전엔 '4강 한국'이 '16강 일본'을 압도했고, 4년 후엔 이종범 선수가 이치로를 눌렀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라색 손수건은 지금도 하염없이 허공을 가르고 있다. 그 사이 수요집회 횟수는 무심하게 700회를 넘겼고, 할머니들은 한두 분 이승을 떠나고 있다. 지난 한해 동안 한 맺힌 삶을 접은 할머니만 17명이다.

이게 현실이다. 그래서 당부한다. 맘껏 즐기되 직시하자.

일본의 야구 천재 이치로가 망언하기 4년 전, 일본의 축구 천재 나카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16강의 꿈을 달성했으니 일본 국민들이 그냥 즐겼으면 좋겠다."

지난 1월 4일 낮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690차 수요시위'.
지난 1월 4일 낮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690차 수요시위'.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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