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따라간 섬진강, 530리

[시인이 따라간 섬진강, 530리-1] 그 눈 시린 봄빛, 봄꽃, 아지랑이...

등록 2006.03.18 19:12수정 2006.03.1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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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섬진강
봄이 오는 섬진강윤재훈

프롤로그(prologue)

너는 도화(桃花)을 보았는가. 나는 도화를 보았다. 섬진강가를 따라 이 시대의 노자가 되어 어질어질 걷다가 왔다.


8차선의 넓은 도로가 우리들의 집 앞으로 지나가고, 자고 나면 앞산이 사라지는 하, 수상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섬진강의 상류는 우리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MP3 흔들며 소녀들 몇 내 앞을 지나가고, PC방이나 성인 오락실을 가면 사람들로 담배 연기로 꽉 차지만, 섬진강에는 아지랑이 피어나고 대밭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자유로웠다. 강은 아직 띄엄띄엄 얼음에 쌓여 있었지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흐르다가, 때로는 집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낙의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오래 전에 인적이 끊어지고 반쯤은 기울어진 빈집들. 휑하니 뚫려 심하게 흔들리는 창호지들의 소리만이 배낭 하나 메고 찾아온, 그래도 비교적 세상의 짐이 가벼운 나그네를 반겨주었다. 쓰러진 문짝들, 담장마저 허물어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이 집을 스쳐간 옛사람들을 기다리는지 삐그덕 삐그덕 대문 소리만 가녀리다. 그렇게 섬진강을 신열을 앓듯이 걷다가 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박인희씨의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고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라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봄빛에 취했는지 막걸리에 취했는지, 촌로(村老)들 몇, 노래 소리에 맞춰 봄볕 내리는 버스 창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렇게 섬진강을 따라 병술년의 봄은 내리고 있었다.



그 눈 시린 봄빛,


백두산으로 떨어진 빗방울이 남쪽으로 흐르면 압록강 물이 되고, 중국 땅으로 스미면 황하와 몸을 섞을 것이다.

어린 시절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에서 목욕을 하면서, 이 물은 어디에서 흘러오는 것일까 하고, 산 쪽을 바라보며 아득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금방 잊었지만, 그것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끔씩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어른이 된 지금 막연하게 품었던 그 꿈을 알아보고 싶어, 섬진강 시원(始原)을 찾아 나섰다.

데미샘 가는 길
데미샘 가는 길윤재훈
배낭 하나 메고 노령과 소백의 품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섬진강의 시원(始原)은 갈수록 계곡 속으로 몸을 숨겼다. 마치 도망가는 뱀처럼 산 속으로 산 속으로만, 꾸불꾸불 찾아 들어갔다.

그렇게 찾아간 그 산의 속내 어디쯤은 간밤에 내린 눈으로,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눈 부신 설경
눈 부신 설경윤재훈

아직 누구에게도 인적을 내주지 않은 그 신생(新生)의 아침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첫 선물이었다.

'눈 쌓인 길 함부로 가지 마라, 따라오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눈 쌓인 길 함부로 가지 마라, 따라오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윤재훈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그 길을 걸으면서 "눈 쌓인 길 함부로 가지 마라, 따라오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라는 서산 대사의 말을 읊조리며,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가 이 아침 눈 내리는 산을 찾아드는 나그네와 무슨 정분이 맞았는지 흥얼흥얼 하여진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헛된 맹세도 없이
봄날 꿈 같이 따사로운
저 무욕(無慾)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 곳이 어디 메냐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그렇게 흥얼거리며 얼마간을 오르자 거짓말처럼 옹달샘이 하나 나타났다.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윤재훈
데미샘, 옛 팻말
데미샘, 옛 팻말윤재훈

그것은 마치 매일 가는 우리 마을 뒷산의 옹달샘처럼 다소곳이 놓여 있었으며, 어린 날 그렇게 그리던 소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우리는 한참동안 들뜬 아이들처럼 서로 즐거워했으며, 하늘을 향해, 태고시대부터 이 산에 깃들어 사시는 산신을 향해, 고천(告天)를 올렸다.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게 될 그 기나긴 길에 대한 안부를 전하면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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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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