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자라는 말속에는 기쁨과 환희가, 패배자라는 말속에는 연민과 슬픔이 배어 있다. 패배자의 모습은 다양하다. 살아서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큰 명성을 얻게 되든지 부모나 형제의 그늘에 가려 평생 주목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 또한 초기의 안정된 생활과는 달리 불운한 말년을 보내게 되는 경우 등.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는 다양한 패배자의 삶을 조명한다. 어쩌면 패배자라는 말보다 불행했던 승리자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인물을 통해서 그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분야 또한 정치, 문학, 음악, 미술, 과학 등 다양하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평전이라 하기에 짧은 분량. 하지만 불행한 운명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일반 전기와 차별된다.
하인리히 만
하인리히 만은 1929년 <마의 산>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의 형이다. 저자는 토마스가 그를 '궁지로 몰아넣지만 않았더라면 어느 정도 만족스런 삶을 살았을 뛰어난 작가'라며 안타까워한다. 어머니는 동생을 편애했고, 형은 동생과 태어난 뒤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해야 했던 것.
"무료함의 고통이 두려워 쓸데없는 책이라도 잇달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다."
해마다 장편소설을 하나씩 발표하려고 노력했던 하인리히의 활동에 대해 토마스가 한 말이다. 어쩌면 형제가 이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더 이상 형이 경쟁자가 아니라고 판단된 순간부터 토마스는 공개적으로 형을 칭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외롭게 골방에 갇혀 글만 쓴 하인리히는 동생의 경제적인 도움 없이는 최소한의 생계도 잇기 어려웠다고 한다. 상호 경쟁적이면서도 서로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그런 관계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들 개인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독자로서도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시인 어머니를 둔 오스카 와일드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열아홉 나이에 옥스퍼드대에 입학한다. 졸업 후 미술평론가로 처음 일하기 시작했으나 원래 꿈이 작가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몇 년 후 시집을 발표한다. 그러나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고 가정을 이룬 후 그는 서른 둘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하여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왕성한 작품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다. 바로 '사랑'이었다.
문학적 야심이 강했던 옥스퍼드대생 더글러스와 사랑에 빠진 것. 더글러스가 열여섯 연하의 여성이었다면 차라리 사회는 관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자와 사랑에 빠진 와일드는 ‘남색죄’로 고소되는 지경에 이른다. 유명한 작가에서 일개 죄수로 신분이 급격하게 하락된 와일드의 '재산은 경매에 붙여졌고, 연극은 무대에서 내려졌다. 책은 압수되고 자식들에 대한 친권까지 말소'된다.
그보다 더한 추락이 있을까? 만기 출소한 오스카 와일드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가난은 그를 인간적인 삶에서 멀어지게 했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만약 오스카 와일드가 더글러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만약 성적 취향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고, 끊임없는 자기 학대와 자해를 일삼아 주위 사람들은 그와 같은 공간에 있기를 꺼려했다. 고흐는 외로웠다. 동거하던 매춘부와의 결혼이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더욱 고독해졌을 것이다. 수십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니던 고흐는 마침내 동생의 도움을 받고 프랑스의 시골 도시 아를로 거처를 옮긴다.
아를에 머무는 400여 일 동안 고흐는 350여 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그 와중에서 동생 테오에게 200여 통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 중 상당수가 문학작품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한 편지들이었다고 하는데 천재는 다방면에 능한 게 사실인가 보다.
고흐가 남긴 8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점심 값 등으로 치른 것을 제외하고 팔린 것은 불행하게 단 한 점뿐이었다고 한다. 전기 작가에 따라서 그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의 그림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1990년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은 일본의 한 보험회사 그룹에 82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다만 그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팔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림이 팔리는 데 따르는 성취감을 조금이라도 맛보았더라면, 미술평론가들의 극찬을 간식처럼 받을 수 있었더라면 고흐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훌륭하지만 불행했던 이들의 삶을 조명한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천재들의 불행한 삶을 통해 만만하지 않은 현실, 혹은 별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 조금은 여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처한 어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어 보이지만, 그 정도의 어려움은 나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패배자>는 그런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태어난 책 같다.
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을유문화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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