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증보다는 여권?

국어능력인증시험(KET) 감독관 체험기

등록 2006.03.23 15:53수정 2006.03.23 15:53
0
원고료로 응원
지난 3월 19일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17회 정기시험이 있었다. 기자는 시험 감독관으로 고사장을 지켰다. 고사장에서 느낀 이런저런 단상들.

학생증보다는 여권

시험을 보기 전에 신분증 확인을 하면서 중고생들이 신분증으로 여권을 많이 가져온 것에 놀랐다. 중고생이라면 학생증으로 신분 확인을 하게 마련인데 아직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학생들은 절반 이상 여권으로 신분증을 삼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권을 가져온 학생 대부분 발급 시점이 초등학생 때였다. 가족과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보다는 어학연수를 위해서 발급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영어 열풍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영어 실력을 갖추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문제는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사교육 시장 과잉으로 필요 이상의 자원이 영어 교육에 투입되고 있다는 것과 언제, 어떻게 영어를 가르치는가 하는 것을 사교육 시장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사교육 시장을 비난하지만 불은 공교육에서 지르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친다는 발표에 대해 교육부는 전면화는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이미 사교육 시장에선 그러니까 적어도 4~5세엔 영어를 미리 시켜야 한다는 속설로 굳어졌고 많은 학부모가 영어를 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에서 제시하는 대로 별다른 선행학습 없이 초등학교에 보내면 수준별 교육으로 다 보듬어 줄까? 알파벳 하나 미리 가르쳐 보내지 않았다고 구박받는 것이 현실이다. 공교육이 일관된 방침을 지키지 못하는 한 사교육 시장은 계속 춤출 것이고 '영어 양극화'는 골이 깊어질 것이다.


지식을 넘어 활용 능력으로

작년과 비교한다면 응시자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응시자도 기존엔 대학생 중심이었는데 중고생부터 성인까지 폭이 넓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학생 응시자들은 행정·외무·기술고시를 대체하고 있는 PSAT(공무능력적성시험)이나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인 MEET(의학교육입문검사)와 같은 언어추론 시험을 준비하는 목적이 많았다.

아무래도 취업이 어려운 시절이어서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직업이나 의사처럼 나이 들어도 경쟁력이 유지되는 전문직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 대학생 응시자들의 의견이었다. 청년 실업을 놓고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던 것이 엊그제 같으나 요즘은 뜸한 것이 사실이다. 최근 가장 강력한 화두인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라도 청년들의 취업 불안감을 걷어주어야 하지 않겠는지.

중고생 응시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입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자립형 사립학교가 입시전형에 채택한 것과 역시 몇몇 대학에서 수시입학에서 이 시험을 인정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영어를 강조하던 자립형 사립학교에서 국어능력 시험을 채택했다는 사실을 두고 '국어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구나'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시험 자체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시험 자체에서 점수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험이 요구하는 능력이 어떤 것들인지 따져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득점 비결을 묻는다면

국어능력인증시험(KET)는 언어추론형 시험이라 할 수 있고 지식이 아니라 잠재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이런 특징은 최근 도입된 PSAT나 MEET도 마찬가지고 요즘 삼성고시로도 불리는 SSAT(삼성직무적성검사)도 이 범주에 들어 있다.

이런 시험은 시간과의 싸움인 경우가 많다. 정한 시간 안에 문제를 다 풀고 검토까지 하는 수험생과 문제를 다 풀지도 못하고 끝내야 하는 수험생으로 갈라진다. 새로운 시험에 옛날 방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국어에 대한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국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인데도 여전히 외워서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SAT 시험도 족집게 강의를 하는 곳을 여럿 보았는데 이런 것에 매달려서는 괜히 돈만 날리기 쉽다.

이번에 PSAT에서 고득점을 받은 어느 수험생의 경험담을 들어보니 견해가 극과 극인 신문 세 개를 매일 1시간 정도 시간을 정해 꾸준히 읽었다고 한다. 특히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른 주장을 내는 것을 눈여겨보았는데 이것만으로도 많은 성과를 얻었다는 얘기다.

신문만 봐서 고시 합격이라니 거짓말이라 생각하시겠지만 새로운 유형의 시험들은 신문이나 뉴스 꾸준히 보고 책도 열심히 읽고 글도 즐겨 쓰면 오히려 그게 공부가 된다. 족집게 강의 들을 시간에 차라리 극장이나 공연장을 찾아 교양을 늘리는 쪽이 유리한 시험들이다.

문제는 교양마저도 족집게로 골라 놓은 책이나 강의를 통해 지식으로 섭취하려는 오래된 습관이다. 학교에서 논술과 구술 비중이 높아지고 고시와 대기업 입사가 언어추론으로 대체된 상황에서 옛 공부 습관을 고집해서는 얻을 것이 없다.

고사장에서 만난 어느 수험생 부자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택시운전을 하신다는 아버지는 아들이 준비하는 시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기도 하고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같이 공부해서 시험을 보러 오셨다. 아들을 가르쳐줄 가방 끈은 되지 못해 그냥 아들 공부하는 옆에서 신문이랑 시사 잡지랑 잔뜩 사다 놓고 그냥 읽다가 서로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준비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게 정답이다.

공부를 좀 하는 아들에게 비싼 과외 하나 못 시키는 게 미안하다며 아들과 함께 걸어가는 아버지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2. 2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3. 3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4. 4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5. 5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