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이상하니까 기본을 가르치라고요?

창의력을 키워주는 미술교육이 되어야

등록 2006.03.28 14:59수정 2006.03.2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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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학교에 갔다가 열 받고 왔어요. 오전에는 수업을 참관하고 오후에는 주부교실 임원을 뽑는다고 하더군요. 저는 수업 참관은 할 수 있지만 오후에는 참석을 못한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별로 안 좋아하는 기색이더군요.

그런데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이 그림이 이상(?)하니까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요.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는데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생각나는 것을 그리도록 했대요. 다른 아이들은 꽃, 병아리, 사람 등을 크게 그렸는데 우리 아이는 우주 같은 거하고 조그만 행성들을 몇 개 그렸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아이의 생각이 중요한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천편일률적인 그림만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가르치는 일은 학교에서 하는 일이 아닌가요? 참내, 받아쓰기 못하니까 학원 보내라고 했다는 선생님이 있다던데 혹시 우리 아이 선생님이 그런 분은 아닌지 못내 걱정이 됩니다.


멀리 미국에 있는 나에게까지 ‘열 받았다’고 하소연을 하는 엄마는 아이를 처음 초등학교에 보낸 대학교수인 학부형이다. 아이의 첫 참관 수업을 보러 간 이 초보 학부형,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을까.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아이 그림이 이상하니 기본을 가르치라”는 말을 듣고 왔다니 내가 생각해도 열 받을 일이다.

그런데 이메일을 함께 읽은 큰딸도 열을 내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 아이 역시 그림 때문에 학교에서 시련(?)을 많이 겪었던 터라 미술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다.

“맞아,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OOO. 미술 선생님들은 정말 자각해야 돼.”

미술과 관련하여 또 다른 심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학부형은 이름이 꽤 알려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첫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 담임교사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반 아이들이 모두 ‘가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 아들은 평범한 다른 아이들의 그림과는 달리 빨강 머리에 구불구불한 곱슬머리를 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희한하게’ 그렸다. 물론 희한하다는 건 담임교사의 판단이었다. 선생님은 불려온 아버지에게 무슨 문제가 없는가를 물어보며 아이가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자신 예술가인 아버지는 이런 그림을 그린 아들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이상하기는 커녕 오히려 평이하게 그린 다른 아이들의 그림보다 개성 있게 '튀게(?)' 그린 아들의 그림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선생님은 ‘관리가 필요한' 이상한 그림으로 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그 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제 멋대로(?) 그림을 그리며 유치원 시절을 보낸 아이가 이렇게 틀에 맞춰야 하는 한국 교육에 적응을 못하면 어떡하나. 소위 왕따를 당하는 건 아닐까.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담임교사로부터 호출을 당한 뒤 고민에 쌓인 아버지를 보며 나는 우리의 미술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 역시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미술교사들은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겨하고, 기다리고 좋아하는 시간이 미술시간이 되도록 도와주는 분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창작 활동인 그림 그리는 일을 무슨 ‘표준화’ '규격화'가 필요한 작업으로 생각하는 교사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위의 경우처럼 ‘이상하다’거나 ‘희한하다’고 평을 하는 교사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참 황당하다.

우리집 아이들 얘기를 좀 해보자면, 이 아이들도 그림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은 아이들이다. 쉽게 말하면 그림을 못 그린다. 하긴, 스케치북 가득 뭔가를 그려서 내기는 하니 아예 못 그린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어려워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누군가(?) 그렇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그림에 대해 지적을 받다 보니 그림 그리는 일을 재미없어 하고, 어렵게 느끼게 되고, 안 그리게 되다 보니 결국은 못 그리게 되는 ‘악순환’을 낳고 말았다. 아이들 그림 때문에 고민하는 내게 어떤 엄마가 그랬다.

"그러게 어렸을 때 미술학원엘 보냈어야죠. 그러면 '기본' 정도는 학원에서 다 가르쳐 주던데. 그렇게 배운 아이들은 뭐든 어려워하지 않고 쓱쓱 잘 그리던데…."

원시적인(?) 교육으로 아이들을 미술학원 한 번 보내지 않았다고 나를 비판하는 엄마가 있었다. 아니, 필요하다면 학교에서 그 '기본'을 가르쳐 주면 되는 거지 왜 학원엘 꼭 보내야 한다는 말인가. 하여간 그렇게 솜씨 없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중학교의 미술시간을 힘들게 보내고 미국으로 왔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어떤 진단을 받았을까.

졸지에 '화가'가 된 아이들

"엄마, 애들이 날더러 '한국에서 온 화가(Korean artist)'라고 해."
"아니, 화가가 다 굶어 죽었니? 어디 화가가 없어서 너 같은 애를 화가라고 부른다니."

우습지만 사실이었다. 애들 말로는 이곳 아이들은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한다. 고등학생이 그린 그림도 유치원 아이 그림 마냥 아주 형편없다고 한다. 물론 미술을 선택한 아이들은 그런대로 봐줄 만하지만 평균적인 아이들은 대체로 못 그린다고 한다. 하여간 이곳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나라 아이들은 모두가 화가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는 게 아이들의 촌평이었다.

미국 고등학교 교내 미술 전시회에서
미국 고등학교 교내 미술 전시회에서한나영
그림 때문에 구박을 많이 받았던 아이가 화가라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런 희소식 말고 나를 더 행복하게 했던 것은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엄마, 이 그림 괜찮아? 안 이상해?"라며 자주 물었던 아이들이었다.

그림을 좋아하게 된 작은 아이의 작품
그림을 좋아하게 된 작은 아이의 작품한나영
"엄마, 여기서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이상하다고 하는 선생님은 하나도 없어. 좀 희한하게 보이는 그림도 창의성이 뛰어나면 굉장히 쳐주는 것 같아. 아이디어가 좋은 베로니카 그림이 학교에 자주 내걸리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야."

피아니스트 백혜선씨가 테크닉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피아노 교육에 대해 따끔한 비판을 했던 게 생각난다. 외국에서는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사람에게 피아노 연습만 죽어라고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교만 뛰어난 피아니스트 대신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창의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도록 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게 하고 미술 전시회에도 자주 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창의성’이란 말은 처음 미술 쪽에서 생겨난 용어라고 한다. 그만큼 미술과 창의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창의성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독창적인 특질인 것이다. 그런데도 남들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게 '무난하게' 그려야 한다고? 넌센스다.

사실 미술은 기술 분야에서 요구되는 것과 같은 ‘표준화’가 필요 없는 활동이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에서는 ‘이상한’ 그림이라고 정죄(?)하고 고치도록 요구한다고 하니 개탄스럽다(물론 이런 경우가 극히 일부이고 극단적인 경우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의 교육도 이제는 각자가 지닌 재능 그대로를 인정하는 교육이 되면 좋겠다. 못나면 못난대로, 이상하면 이상한대로 그대로를 인정해 주자는 것이다. 빨강머리 아버지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건 선생님의 독단이고 잘못된 판단일 뿐이다.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이상하고' '희한한' 그림이라고 판단을 한단 말인가.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결코 이상하거나 희한한 법은 없다. 마치 창의성이 틀리는 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다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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