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부다페스트발 로마행 기차에 오른 안익태. 그의 1940년대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 안익태기념재단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씨가 1940년대 독일주재 일본외교관의 집에 머물며 베를린 일본공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한 일본 천황을 '한국인의 첫 황제'로 지칭한 듯한 안씨의 1938년 인터뷰 기사도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음악연구가 송병욱(훔볼트대 음악학과 석사과정)씨는 지난달에 이어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4월호 기고문을 통해 안씨가 은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 2통을 소개했다. 편지는 1942년 3월 24일과 44년 2월 23일에 각각 작성됐다.
베를린 전출입 문서 보관소에 따르면, 발신지는 1940년 부임한 일본 외교관 이하라의 집이었고 서류에 '치외법권'이라는 문구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외교관 이하라'는 최근 논란이 된 '만주국'의 작사자 이하라 고이치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안씨는 1942년 편지에서 "이하라씨와 저는 진심으로 선생님(슈트라우스)의 6월 베를린 체류시 선생님과 사모님을 저희 집에 손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저희 집'이라는 표현과 발신지를 종합해 보면 안씨는 1942∼44년 일본 외교관의 사저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안씨는 같은 편지에서 "베를린에 오시면 부디 사무실로 저나 이하라씨 앞으로 도착하셨다는 전보 한 통 보내주십시오"라고 썼다. 송병욱씨는 "이 '사무실'은 외교관 이하라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 외교공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씨의 부인 로리타 탈라베라가 1974년에 쓴 회고록 <나의 남편 안익태>에는 "1940년 부다페스트의 일본대사관 주최 파티에서 안익태와 인사를 나눴다"는 '헝가리 귀족 부인' 릴리 카시안의 얘기가 담겨있다. 1935년 '애국가'를 작곡했던 안씨가 적어도 2차대전 시기에는 일본으로부터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 대우를 받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씨는 1944년 독일 패망 후 스승 슈트라우스가 전범으로 몰리자 파시스트 정권 지배하의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안씨가 1938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한국환상곡'을 초연하기에 앞서 현지언론과 가진 인터뷰에도 친일성향이 의심되는 대목이 있다. 미주 <한인학생회보> 1938년 4·5월호에 따르면, 안씨는 <아이리쉬 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2천만 한국인들에게 음악은 하늘로부터의 선물이다. 음악은 2천여 년 전 첫 황제와 함께 하늘로부터 직접 왔다.(It came to them with their first Emperor direct from Heaven over two thousand years ago) 그것은 여러 세대 동안 노래와 연주곡의 형태로 충실히 보존되어왔다"
송씨는 "음악은 하늘로부터 왔다"는 발언이 안씨가 같은 해 8월 완성한 '에텐라쿠(越天樂, 하늘에서 온 음악)'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에텐라쿠'는 일본 황실의 궁중음악으로, 일본 음악가 고노에 히데마로가 이를 서양 관현악으로 편곡한 작품을 만든 바 있다. 안익태가 고노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1938년 8월경 안익태판 '에텐라쿠'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안익태는 이 곡이 해방 이후 정치상황 하에서 더 이상 '에텐라쿠'라는 제목으로 통용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곡에 어느 정도 손질을 가한 후 그 명칭을 내용상 같은 의미를 갖도록 '강천성악'으로 바꾸는 한편, 마치 세종의 아악 창작 과정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듯 이야기한 것으로 추정된다."(송병욱, <객석> 3월호 기고문)
안씨가 인터뷰에서 '2천여 년의 첫 황제'를 말한 것도 의문으로 남는다. 안씨는 1936년 3월 26일 <신한민보> 기고문에서 두 차례나 '4천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그는 2년만에 한국사의 연원을 2천년이나 줄여 잡은 셈이다. 송씨는 안씨가 당시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던 점을 들어 실언 가능성을 배제했다.
한국사에서 '2천여 년의 첫 황제'에 근접한 인물로 고구려의 동명왕(BC 58∼19)과 신라의 박혁거세(BC 69∼AD 4)를 들 수 있지만, 안씨가 단군 왕검을 제쳐두고 이들을 '첫 황제'로 지칭했을 지 의문이다.
| | | "천황 앞서 연주하는 게 청년 안익태 소원" | | | | 미국 보스턴 교민 박기식씨는 30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1세대 교민 임창영 박사의 생전 증언이라며 "안익태는 미국유학 시절 첼로 연주에 심취해 있었는데, 청년시절의 안씨가 평소 '내 소원은 일본천황 앞에서 첼로 독주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96년 별세한 임씨는 1948년 서재필 박사의 개인비서, 1960∼61년 주유엔 한국대사를 지낸 인물이다.
평양 출신의 임씨는 자신보다 2년 늦게 미국에 온 동향후배 안익태가 1932년 필라델피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줬다고 한다.
박씨는 "그러나 안씨가 미국에서도 일본식 이름 '에키타이 안'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못마땅해 임 박사가 안씨를 몹시 나무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 | | | |
송씨는 안씨의 '첫 황제'가 일본 황실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진무텐노(神武天皇)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일본신화에는 진무텐노가 BC 660년에 천황이 된 것으로 나와있기 때문에 안씨가 인터뷰한 시점으로부터 600여 년의 시차가 있다.
한편, 안씨는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같은 인터뷰에서 이씨 성을 가진 왕자(Prince Lee)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움직임을 소개하고 "모국이 아일랜드처럼 독립하길 바란다"고 말하기도 해, 친일의식과 민족의식이 혼재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안씨는 이후 1938년 8월 '에텐라쿠'를 완성하며 일본측으로 돌아섰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송씨의 해석이다.
안씨가 '에텐라쿠'를 마지막으로 지휘한 1943년 8월 18일의 연주회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이 한국식(Eaktai Ahn)이 아니라 일본식(Ekitai Ahn)으로 표기된 것도 지금 시점에서 곱씹어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