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서울 시내 외곽 곳곳에 얼마 전부터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재혼, 장애인 환영"이란 현수막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최근 일간지(<한겨레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준비된 베트남 신부, 마음만 먹으면 가능"이라는 제목 아래 "노총각, 재혼하실 분, 자식 때문에 재혼을 못하신 분, 장애우 환영".
이어서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까지 친절하게-아니면 자의적으로- 분석해 놓은 구절까지 덧붙이고 있다.
베트남 신부의 장점은 "혈통이 우리와 비슷하다. 일부종사를 철칙으로 알고 헌신적으로 남편을 섬긴다. 사치하지 않고 아주 검소하다. 억척스런 생활력이 있고 자기희생적이며, 매우 부지런하다. 가족 중심적이라 부모님을 잘 모십니다."
그 밑에는 현재 '베트남 실정'까지 적혀 있는데, "신랑보다 신부가 많다. 선호하는 국제결혼 상대가 한국 남성"이라는 이해 못 할 문안까지 덧칠되어 있다. 왜 베트남 여성이 한국의 남성을 선호하는 것일까? 재력이, 감수성이, 아내를 대하는 세련된 품위가, 이도 저도 아니면 무엇이….
더 웃기지도 않은 광고 문안은 "중국, 필리핀 여성과 다르게 체취가 아주 좋다, 도망가지 않고 정조 관념이 투철하다, 몸매 세계 최고, 어른 공경하고 4대까지 제사 지낸다"는 것이다.
이건 결혼 중매 광고가 아니다. 아주 노골적인 성 상품 광고요, 아예 대놓고 펼쳐 놓은 성매매 뚜쟁이 광고다.
아프리카 흑인의 비애; 사라 바트만
18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스무 살 한 젊은 흑인여성이 백인의 사탕발림에 속아 그의 손에 이끌려 런던으로 떠난다. 고향을 떠나는 그녀로서는 이후 100년이 넘도록 유럽인의 성적 노리갯감으로 전락해 다시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이코이(Khoi Khoi; '인간'이라는 의미) 부족이었던 그녀는 런던에서 '사라 바트만(Sara Baartman ; Saartjie Baartman)'이 된다. 그녀가 영국에서 한 일은 어처구니없게도 살아 있는 전시물이 되는 것이었다. 사라 바트만을 아프리카에서 데리고 온 후견인은 5년간이나 영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그녀의 신체 구석구석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괴물 쇼(freak show)'로 큰돈을 번다. 일종의 매춘 신세의 노리갯감이다.
유럽인들이 사라 바트만에게 붙인 애칭은 '호텐토트(열등 인종) 비너스(Venus Hottentot)'였다. 이것은 남아프리카 '부시맨'을 기술하는 경멸적 표현으로 백인들의 인종적 냉소적-오만과 편견의 극치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당시 유럽사회에서 백인인 유럽인들은 식민지 침략의 정당성을 인종적 우월성에서 찾았다. 그녀를 통해서 백인들은 인종적 우월성을 뽐냈던 것이다.
많은 유럽인들이 인류학자, 여행가의 이름으로 빈번히 남아프리카를 왕래했다. 이들은 유목민이었던 코이코이 부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우수한 원숭이'쯤으로 생각하고, 특히 이들의 생식기관에 관심을 가졌다. 신체 특정부위를 과장되게 묘사해 유럽사회에 퍼뜨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성적 관심을 가지도록 부추겼다.
영국인들은 그녀의 생식기를 '칠면조의 목에 매달려 있는 피부'로 앞치마(에프론)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배보다 둔부(buttock)가 더 튀어나온 코이코이인들의 너무도 자연스런 해부학적 특징을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보면서 인종적 편견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엄청나게 큰 가슴과 툭 튀어나온 엉덩이를 코이코이 부족의 특징으로 묘사한 그림이 그것을 말해준다. 사라 바트만의 나체의 몸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를 보면서 백인으로 또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것을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다.
'괴물 쇼'는 1400년경 프랑스 왕실에서부터 기원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다른 것'은 반드시 왕실로 가져와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동물은 물론 사람도 그 대상이었다. 프랑스 왕실의 이러한 취미는 대중들에게 전달되어 '별난 쇼'로 발전했다고 한다.
사라 바트만은 런던 윌슨스 뮤지컬 근처, 피커딜리 225번지 앞 빌딩에서, 어떤 때는 대학에서, 때론 박물관에서, 서커스 등에서 전시되곤 했다. 피커딜리는 이미 이런 쇼가 번성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신체부위가 크거나 작은, 그리고 불구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었고, 기형의 동물들에게 여자 옷을 입혀 전시해서 돈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장사'가 여의치 않자 그는 사라 바트만를 데리고 파리로 건너간다. 4년간의 런던 생활 이후에 파리의 야생 동물 흥행사에 넘겨지고, 1814-1815년 사이에는 이동 서커스를 따라 전시되었다. 그녀는 동물 조련사에게서 거의 동물과 다름없이 취급되었다.
파리에서도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던 그녀는 마침내 1816년 스물여섯이란 나이에 매춘과 알코올 중독으로 한 많은 고독한 인생을 마치게 된다.
그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주검은 제국주의적 비교 해부학 과학자들의 의학실험 대상이 되는 기구한 운명을 맞는다. 이 기구한 한 흑인 여성 사라 바트만의 비참한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도 않았다.
그녀의 해골은 인종 차별과 성적인 놀림감으로 'The Hottentot Venus or Hatred to French Women'이란 프랑스 코믹 오페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던 그 시절,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떠난, 한 인간인 흑인 여성 사라 바트만은 살아서는 '호덴토트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런던 박물관에 살아있는 채로 전시되었고, 죽어서는 박제되어 프랑스 '인간 박물관(Musee de l'Homme)'에 남아 있었다.
1985년까지 그녀의 몸은 박제되어 파리 인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전담 외과 의사였던 쿠비에르는 그녀의 뇌와 성기를 연구 대상으로 분리, 포름알데이드 용액 담아두고, 인체의 뼈대는 표본 박제로 남겨진 채로 보관하였다.
살아서는 '살아 있는 박제'로 죽어서는 인간과 유인원 간의 중간적 존재로 간주되어 연구 대상으로 남은 채로 말이다.
192년간이나 타향에서 떠돌던 우리의 가련한 한 영혼인, 참으로 '존귀한 한 여성 인간' 사라 바트만은 2002년 5월에야 비로소 프랑스 정부로부터 유해가 송환되어 현재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강변 한 편에 그 억겁의 한을 품은 채 조용히 묻혀 있다고 한다.
실제로 사라의 신체가 서구인들에 비해 기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관련 사가들의 증언이다. 영국 재판부는 사라 바트만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사라 바트만은 돌아가서 '노예'가 되거나 질병에 대한 '면역 상실'로 죽게 될 것을 두려워 해 그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라는 사리를 분간할 줄 아는 영리한 여자였던 셈이다.
인종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종적 편견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은 백인이었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아프리카를 떠나 북구 유럽을 떠돌다 흑색의 피부에서 돌연변이로 백색이 된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흔히 이성론자로 대표되는 대표적 철학자 칸트도 여러 강의록에서 서양인의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흑백의 두 인종 간의 '정신적 능력' 차이는 피부색 차이보다도 더 큰 것처럼 보인다"거나,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대단히 일찍 분별 있게 되었지만, 그들의 오성은 그 후에 같은 비율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 그들의 정신의 권태는 술, 담배(타바꼬), 아편 그리고 다른 강한 것들에서 자극적인 것을 찾았다."
"인간성은 백인 종족에서 가장 큰 완성 상태에 있다. 황색의 인도인들은 보다 떨어지는 재능을 가졌으며, 흑인(니그로)들은 더 낮고, 가장 낮은 종족은 아메리칸 인종 중의 일부이다. …… 백인종은 언제나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기독교도 백인들은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 인디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들도 인간으로 대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교황청에서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 대하라"라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마치 흑인들을 인간이 아닌 유인원으로 보고 함부로 학살했듯이, <...참여할 수 있는 한> 이라는 단서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기독교적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인디안/인디오들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학살했을 것이다.
물론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은 지난 세기 인간 역사에서 저주받을 만한 일이긴 하지만, 그 뿌리는 아직도 신화와 같이 우리의 심성에 깊이 박힌 채로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한국인과 결혼 후 혼인비자를 신청하기에 앞서 건강검진을 받은 베트남 여성 중 에이즈 보균자가 2명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지난해 6~12월 한국인과의 결혼 후 혼인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건강검진을 받은 베트남 여성 532명 중 69명이 질병보유자이며, 이 중 2명이 에이즈 보균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교부는 질병보유자 69명에 대해 비자발급을 불허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또다시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그릇된 인종적 편견이 생겨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 않아도 유색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종족이라는 편견과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은데 말이다.
이 땅에도 이미 이주노동자 40만 명이 넘어서고 있고, 이 순간에도 많은 수의 '코시안'들이 태어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이들을 경멸하고 순종적 혈족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그들에게 순혈적 혈통주의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인종적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달 초에는 순종이 아닌 혼혈의 미식축구의 영웅인 하인즈 워드가 어머니 나라를 방문한다고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인종적 편견이 사라져 피부색에 의한 차별이 없는 인권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 사라 바트만에 관한 정보는 아래 인터넷 사이트에서 얻었음을 밝힙니다.
1. http://www.frif.com/new2003/rsara.html
2. http://www.frif.com/new99/hottento.html
3. http://www.nathanielturner.com/hottentotvenus.htm
4. http://www.nathanielturner.com/sarastor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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