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very proud of you" 4일 오전 하인즈 워드가 태어난 이대대학병원에 붙은 플래카드.오마이뉴스 박상규
또다시 묻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핏덩이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것일까요? 기자는 이민 간 것이 아니라 추방당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혼혈, 그것도 우리가 그리 깔보고 징그러워했던 '검둥이 자식'을 낳고 살기에는 이 땅의 시선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검둥이 자식'을 낳은 여자를 '양××'라 부르며 마치 문둥병 환자 보듯 하던 지난날의 시선에서 기자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혼혈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못합니다.
아니 혼혈들과의 마주침 자체를 피하려는 것이 우리 속 좁은 단일민족(?)의 허울입니다. 인순이의 노래는 좋아하면서도 그녀의 정신없이 헝클어진 곱슬머리에는 눈살을 찌푸립니다. <문화일보>는 약 3만5천 명에 이르는 혼혈 출생 중에서 피부색과 혈통으로 1/3 가량은 부당한 대우와 따돌림, 폭력을 경험하였으며, 20% 가량은 자살충동을 자주 느꼈다는 조사결과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헤니 등은 참으로 예외에 속합니다. 백인 혼혈의 잘생긴 외모는 눈감아 주면서 동양(주로 인도차이나 계통의 피가 섞인) 혼혈이나 흑인 혼혈에 대한 편협한 시선과 질시는 부끄럽고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오죽하면 지하철 광고에 '살색'은 틀린 말이라는 공익광고까지 필요했겠습니까.
하인즈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미디어는 예의 호들갑과 선정적 보도로 혼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말이야 지극히 당연합니다.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조용했을까요? 사회적 의제가 되기에는 부족할 만큼 우리의 사회가 그동안 건강했던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혼혈과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외국인에 대한 편견은 그 냄새를 참아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미 곪아 터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 냄새가 싫었던 것입니다. 국민이 싫어하니 미디어가 굳이 그것을 건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미디어입니다.
하긴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저 역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인즈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쓰고 있는 사실은 분명하니까요. 언젠가 라이 따이한(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인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친자확인소송에서 아버지를 찾았다는 보도 후 라이 따이한, 나아가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던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더군요. 우리가 저지른 추하고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각성은 어느 미디어에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보'라는 수사를 늘 앞에 내세우는 어디 누구도, 없는 아비와 다른 생김새로 그들이 자신의 조국에서 당하고 있는 차별에 대하여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 진보들이 그리도 날 세우며 비난하는 '미제'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후계들을 받아들여 나중에라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오늘날 일방주의 미국의 전면에서 전쟁을 도발하고 국익만을 추구하는 무리 뒤에는 보이지 않게 자신들의 과오와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침략에 대하여 솔직한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미국의 건강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숱한 낭패에도 미국을 견인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건강성은 치유불능의 환자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