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빅토리아의 85번째 생일 축하해요"

[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 42] 내 친구는 '퀸' 빅토리아

등록 2006.04.18 20:55수정 2006.04.1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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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일요일(4월16일)은 빅토리아 할머니의 깜짝 생일파티 날이었습니다. 시내 가까운 공원 안에 있는 카페에서 열린 그 파티에는 빅토리아(Victoria) 할머니의 가족들과 절친한 친구들 약 삼십 여명이 참석하여 할머니의 여든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절친한 친구 자격으로 참석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아가처럼, 소녀처럼 한없이 기뻐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습니다.

빅토리아 할머니의 실제 생일은 그보다 이틀 전인 4월14일입니다. 그 날이 주말이 아닌 관계로 친구들까지 참석하는 생일파티는 일요일로 미루어서 잡아 두었던 겁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초대장을 보내고 장소를 예약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해 온 이 생일파티에 대해서 정작 주인공인 빅토리아 할머니는 그 날 아침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든다섯 살이 되는 올해 할머니의 생일을 더욱 특별하게 기념하기 위하여 가족들은 깜짝 생일파티를 열기로 했고, 그래서 할머니가 눈치 채지 못하게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시켰던 겁니다. 지난해에는 아내가 우리 집에서 우리끼리 조촐하게 할머니의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해서 할머니를 감동시켰는데, 올해에는 온 가족들과 친구들이 한통속(?)이 되어 할머니를 놀래 주기로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놀라움이 안겨다 줄 감동을 누리기에 앞서서 할머니께서는 몹시도 서운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워낙 인품이 고운 분이라 겉으로는 아무 내색을 안 하셨지만,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생일이 다가오는데도 모두가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속으로는 무척이나 섭섭하게 생각했을 테지요.

a 비밀리에 받은 생일 파티 초대장에 인쇄된 어렸을 적 빅토리아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비밀리에 받은 생일 파티 초대장에 인쇄된 어렸을 적 빅토리아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 정철용

더구나 아내를 몹시 예뻐하셔서 늘 무언가를 만들어 주시는 등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그렇게 사랑을 쏟은 아내가 할머니 생일을 잊은 척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번 생일 파티 전에 아내와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잠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큰딸 안젤라(Angela)가 이번 생일 파티를 그렇게 계획해서 우리도 그 뜻에 따라 마음의 준비를 했던 거지요.


생일 파티장에서 우리를 맞이한 빅토리아 할머니는 몹시 들떠 있었습니다. 준비된 순서에 따라 큰딸 안젤라로부터 화관을 받아 머리에 쓰고 가운을 받아 어깨에 걸치고 인사말을 하던 할머니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채 잇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당신의 삶이 너무나 행복하고, 또한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씩 할머니를 방문하는 요즈음이 당신의 삶에 있어서 절정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2.


그래요. 우리는 언제부턴가 할머니에게 너무나 소중한 친구가 되었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빅토리아 할머니 역시 너무나 소중한 친구입니다. 우리가 이곳 뉴질랜드에 이민을 온 후 사귄 사람들 중에서 할머니는 가장 친한 우리의 친구입니다. 아내나 나나 한국에 두고 온 몇몇 친구들과 지금까지도 굳건히 우정을 지키고 있긴 하지만, 그들과 주고받는 전화와 전자메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많은 부분을 빅토리아 할머니와는 나눕니다.

처음 아내가 빅토리아 할머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년 전쯤 아내의 일본인 친구 중 한 명이 할머니의 이웃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부터입니다. 큰딸 내외와 함께 살고 계신 빅토리아 할머니를 할 일 없고 심심한 노인 정도로 오인한 그 일본인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할머니를 방문해 영어 실력을 늘리자고 아내에게 제안했습니다.

할머니가 쾌히 승낙을 해서 아내와 아내의 일본인 친구 두 사람은 꾸준히 할머니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언제나 손수 구운 맛난 케이크와 과자를 대접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순조롭지 못했던 삶의 이야기와 가족들 이야기를 들려 주셨고, 아직 어눌한 영어로 더듬거리며 말하는 이방인의 이야기에도 언제나 호기심과 진지한 관심으로 귀를 기울여주셨습니다.

헤어질 때는 항상 남은 케이크와 과자를 싸서 아이들과 남편들에게도 갖다 주라고 건네주셨고, 또한 틈틈이 뜨개질 솜씨를 발휘하셔서 목도리 등을 짜 주시는 등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나이든 딸이 아직도 직장 생활을 하는 탓으로 할머니께서는 가사 일로도 몹시 바쁘실 텐데도 말입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기억력과 판단력이 젊은 사람들만큼이나 예리하시고, 지적 호기심이 많아 지금도 역사책을 위시해서 여러 가지 책을 즐겨 읽으시며, 남에게 부담을 주는 말과 행동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깔끔하고 독립적인 할머니. 이런 단아하고 사랑스런 할머니를 아내가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a 할머니는 아내를 꼭 닯은 인형을 손수 만들어 선물하셨다

할머니는 아내를 꼭 닯은 인형을 손수 만들어 선물하셨다 ⓒ 정철용

할머니의 깔끔함을 알아보는 아내에게서 할머니 또한 아내의 그것을 알아보았는지 할머니는 처음부터 누구보다도 아내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이불 위에 덧덮는 담요를 두 벌이나 짜 주셨고, 지난 3월 말 아내의 생일에 즈음해서는 실로 짠 옷을 입힌 큰 인형을 손수 만들어 아내에게 선물로 주시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이미지와 꼭 닮은 인형을 받고 아내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답니다.

3.

옆에서 부러워만 하던 나도 언제부터인가 그 모임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매일 차고에서 모형 비행기를 만드느라 바쁜 사위 앨런(Alan)도 참가하게 되어 그 모임은 어느덧 애초의 목적인 영어 실력 늘리기와는 상관없는 서로의 정과 삶을 나누는 터전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할머니와 알고 지내던 사이인 듯 가까운 사람이 되었고, 서로의 가족 행사에도 종종 초대받고 초대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난 12월에 열린 큰딸 안젤라의 생일파티는 파티를 워낙 즐겨하는 아내에게도 정말 잊지 못할 좋은 추억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안젤라의 65세 생일을 특별히 축하하기 위하여(뉴질랜드에서 65세는 국가로부터 연금이 지급되기 시작하는 나이랍니다) 카페를 하나 빌려 열었던 그 날 생일파티의 주제는 '죽은 유명인사로 분장하기'였습니다.

a 춤추는 마타하리와 간디 사이에 한복을 입은 아내도 끼어들다

춤추는 마타하리와 간디 사이에 한복을 입은 아내도 끼어들다 ⓒ 정철용

주인공인 안젤라는 전설적인 미녀 스파이 마타하리의 의상으로 차려입었고, 그녀의 딸은 다소 비만한 클레오파트라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 더운 여름날, 영화 <스타워즈>의 전사가 되어 마스크 안에서 땀을 비 오듯 쏟은 최악의 선택도 있었고, 반면에 거의 나체 차림으로 나타나서 "나는 간디다"라고 주장하며 보는 사람까지 시원하게 만든 이도 있었지요.

이렇듯 생일파티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분장을 하고 나타났는데, 빅토리아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이름인 '빅토리아'에 걸맞게 19세기 영국의 여왕 빅토리아의 분장을 하고 참가했습니다. 은색 왕관까지 쓴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려서 그 이후로 할머니를 '퀸'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a '퀸' 빅토리아와 함께 포즈를 취한 아내의 일본인 친구들

'퀸' 빅토리아와 함께 포즈를 취한 아내의 일본인 친구들 ⓒ 정철용

어떤 의상을 입어야 할까 무척 고민하고 있던 아내에게 할머니와 안젤라는 부디 한국의 전통 의상을 입은 모습을 보여 달라는 부탁을 해서 아내는 이민 올 때 버리지 않고 챙겨온 한복을 입고 참가했지요. 보는 이들마다 "어쩜 한국의 의상이 이렇게 예쁘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아서, 그냥 양복 차림으로 갔던 나의 무색함을 많이 덜 수 있었습니다.

4.

이렇게 크고 작은 가족 행사에 서로 초대하고 초대받고 하다 보니 이제는 빅토리아 할머니가 친구가 아니라 한 가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빅토리아 할머니께서도 재작년 둘째딸 수(Sue)의 집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 때 나와 아내에게 "너희는 우리 가족 같다"라고 귓속말로 말씀하시더니, 요즘은 "너희는 우리 가족이야"라고 아예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빅토리아 할머니가 우리에게 가족으로 여겨지든 친구로 여겨지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어떤 때에는 영어를 더듬거리면서 속시원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데도 누구보다도 더 깊은 관심으로 그런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가졌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피붙이 하나 없는 낯선 이국의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진심으로 우리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할머니의 생일 카드에 우리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과 함께 우리 집 정원에서 아내가 발견한 네 잎 클로버를 잘 코팅해서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a 깜짝 생일 파티에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빅토리아 할머니

깜짝 생일 파티에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빅토리아 할머니 ⓒ 정철용

빅토리아 할머니는 우리가 이곳 뉴질랜드에서 발견한 네 잎 클로버입니다. 아내와 나의 친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지만, 그 어떤 친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생기발랄한 마음과 영혼을 가진 빅토리아 할머니. 한국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에게처럼 말로는 속시원하게 모든 얘기를 주고받을 수는 없지만, 빅토리아 할머니는 그 어떤 친구보다도 우리의 이야기를 더 잘 알아듣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빅토리아 할머니의 여든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서 할머니의 행복과 건강을 비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빅토리아 할머니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시고, 변함없는 우정 약속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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