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삐삐
삐삐 :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제가 코 파기 시간에 딱 맞춰서 온 거죠?
선생님 : 그래, 하지만 조금 더 조용하게 왔으면 좋을 것 그랬구나. 아무튼 학교에 온 걸 환영한다. 삐삐야.
삐삐 : 고맙습니다.
선생님 : 우리 학교가 네 마음에 들면 좋겠다.
삐삐 : (줄곧 아주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선생님이랑 아이들이 행동을 늘 바르게 하면 마음에 들 거예요.
삐삐의 태도는 얼마나 당당한가. 학교에 처음 와본 고아 아이가 선생님께 행동을 바르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삐삐가 등장하기 이전엔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당당한 어린이 모습이다. 우리는 경악과 동시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뿐인가,
"오늘 셈 하기는 그만 끝내는 게 좋겠다!"는 말에 삐삐는 선생님 뺨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이 여태까지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똑 소리 나는 말씀이었어요. 선생님은 참 친절하고 상냥하세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정말 좋아요. 하지만 선생님이 사람을 조금 피곤하게 만들기는 해요. 그건 선생님도 인정하시죠?"
삐삐의 이런 행동은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삐삐는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행한 억압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으며, 그것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 이것은 말괄량이 삐삐가 1945년 처음 발표된 뒤, 지금까지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 린드그렌은 삐삐를 통해 규율과 제도권 교육의 문제점, 어른과 아이들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특유의 유머를 담아 풀어 놓고 있다.
아이들이 비판적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을 탓할 수 없다.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에게 반공교육을 세뇌시킨 권력자나 권위적인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아이들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만약 그때 우리에게 삐삐와 같은 괴력의 힘이 있었다면, 금화가 잔득 든 가방이 있었다면, 그 누구도 나를 구속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삐삐처럼 학교에 가지 않았을 거다. 어른들에게 아이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삐삐가 지금까지도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직도 어린이들이 억압된 규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때와는 다르지만, 요즘 어린이들도 경쟁체제로 인해 어린이가 누려야할 자유와 인권을 희생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어른들에 비해 신체적으로 약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다. 그러니 삐삐는 여전히 대리 만족을 주고 부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다.
<삐삐는 언제나 마음대로야>(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우리교육)는 린드그렌이 말괄량이 삐삐이야기를 동극으로 꾸민 것이다. 그래서 전체내용이 동극 극본이고 뒤편에 이 작품을 어떻게 동극으로 올릴 것인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릴 적에 보았던 삐삐를 추억했다. 나는 이제 삐삐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나이의 아이를 둔 부모다. 지금 내가 보는 삐삐의 모습은 단순히 통쾌하고 우스운 재미만 주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구조적으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어릴 적 나처럼 단순히 보고 즐겼으면 한다. 왜냐하면 재미있게 읽어야 할 동화책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라고 요구한다면, 어린들에게 동화책 읽는 즐거움을 빼앗는 것일 테니 말이다.
삐삐는 언제나 마음대로야 - 세계 아동극 선집 1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라합 옮김, 김무연 그림,
우리교육,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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