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중국 교회건물이나 상하이의 중국 건물이 똑같다.유창하
마찬가지로 인천 조차지도 일본과 청나라의 조차지역으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와 잡화, 식품, 소금, 사금을 거래하는 등 상업 활동이 활발히 일어난 지역이었고, 산둥반도까지 여객선이 정기적으로 다닐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았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화교들이 대만, 미국, 동남아 등 다른 나라로 떠나고 일본인들마저 1945년 해방이후 자취를 감추자 차이나타운은 떠나지 않은 소수 화교들의 생활터전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그 후에도 차이나타운은 한국전쟁으로 큰 화를 입고, 한국정부의 부당한 화교정책으로 차이나타운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2000년 들어 인천광역시와 민간, 화교자본이 인천 역사거리 조성, 중국풍 거리 리모델링 등 화교들의 투자유치를 위한 과거명성 찾기 '부활 프로젝트' 인프라 구축에 나섰고 그 후 상권이 살아나고 외부 방문객의 수도 지난해 40만 명을 넘는 등 급격히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차이나타운 건물, 상하이 조차지 옛 거리와 흡사
인천항이 훤히 보이는 자유공원 계단을 내려와 상하이에 흔히 보던 건물 양식의 일종인 일본인이 개설했다는 구 일본제일은행 인천지점 건물을 지나 인천차이나타운 입구에 들어서니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에서 기증했다는 중국식 대문인 패루(牌樓)가 깔끔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여기가 차이나타운임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