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덕꾸러기 '사투리'의 반란

[대중문화] 물 밀듯 밀려오는 대중문화 속 사투리

등록 2006.05.11 19:40수정 2006.05.1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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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가요나 영화에는 반드시 표준어만을 쓰고 사투리를 쓰면 안 되는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문화에서 종횡무진이다.

영화에서 시작된 사투리 열풍?

<웰컴 투 동막골>
<웰컴 투 동막골>필름있수다
"고만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영화 <친구(2001)>의 이 한마디 대사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면서 장기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황산벌(2003년)>은 영호남 사투리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구성해냈고 '거시기'라는 단어는 한동안 새로운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최근 흥행 영화들은 대부분 사투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선생 김봉두 (2003)>에 이어 <웰컴투 동막골(2005)>은 강원도 사투리를 등장시켰다. 특히 강혜정의 사투리 신드롬의 영향을 받아 드라마 <진짜 진짜 좋아해> 유진,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의 정려원은 모두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강원도 출신 여성으로 나온다.

<가문의 영광 2(2005)>에서는 집단적으로 전라도 사투리가 나왔고, <거룩한 계보(2006)>에서도 전라도 사투리가 선보일 예정이다. <사생결단(2006)>에서는 부산 경남 사투리를 황정민 류승범이, <투사부일체(2005)>에서도 정운택이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다. <나의 결혼 원정기(2006)>와 <마이캡틴 김대출(2006)>에서도 주요 인물의 입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쏟아져 나온다. 양동근, 한가인 주연의 드라마 <미스터 깽>, 정태우와 김재원의 <위대한 유산>은 부산 사투리를 등장시키고 있다.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는 흔한 일, 여기에 충청도까지 가세했다. <맨발의 기봉이(2006)>에는 완화된 충남 서산 사투리가 나오고 <짝패(2006)>에서는 거친 충청도 사투리를 배우 이범수가 입에 달았다. 국내 사투리를 벗어나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한다. <태풍(2005)>에서 평양 사투리를 장동건과 이미연이 썼고 <국경의 남쪽(2006)>에서는 평양 사투리를 차승원과 조이진이 입에 담았다. <댄서의 순정(2005)>에서는 문근영이 옌벤 사투리를 뱉어 냈다.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새 화두는 사투리일까?

드라마·영화·연극에 이어 TV 오락 프로그램도 사투리를 주요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방송제작진들은 대중문화의 블루오션이며 지역감정 해소에 기여한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지난 5월1일 첫 방송된 MBC <말(言)달리자>는 이른바 사투리 퀴즈쇼다. 표준어 퀴즈쇼는 많이 보았지만, 사투리 퀴즈쇼는 생소하다. 우선, 각 지방 대표가 사투리로 설명하고 단어를 맞히는 '사투리 다섯 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사투리 능력시험, 듣기평가, 말하기 영역도 있었다.

사투리를 잘하는 연예인과 사투리 경연대회 수상자들이 함께 출연했다. 국립국어원 본부장 등이 전문 자문단이다. 경북 영천 출신 김제동이 MC이며, 주말 드라마에서 강원도 사투리 연기를 하고 있는 유진 등이 출연했다. "할머니와 손자가 오랜만에 같이 즐겁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는 평도 있었다. MBC에서는 <언어공감 사오정>도 내놓을 예정인데 이 프로그램은 전국 각 지역 시청자들이 사투리로 특정 연예인을 묘사하면 연예인 패널들이 맞혀 가는 토크쇼 방식이다.


KBS <개그 콘서트>의 '생활사투리'에 이어 최근 SBS <개그1>은 '서울사람'이라는 코너에서 사투리를 소재로 다루었고 KBS <스펀지>는 지난 4월22일 방영분에서 사투리 구사의 법칙을 소개하는 등 사투리 아이템을 내놓았다.

과거와 다른 특징이 있다?


MBC <진짜 진짜 좋아해>
MBC <진짜 진짜 좋아해>iMBC
과거에는 주변부, 혹은 조연들만 사투리를 썼지만 지금은 주인공들이 사용한다. 예전엔 나이 많은 노인, 부모 혹은 촌스러운 인물이 사용했지만 지금은 젊은이들뿐만 세련된 외모의 인물들이 사투리를 입에 담고 있다.

같은 지역이라도 약간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 <마이 캡틴 김대출>은 부산과 경주의 사투리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짝패>는 흔히 느릴 것만 같은 충청도 사투리의 과격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북한 지역 사투리나 강원도 사투리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투리가 늘어나면서 지방 출신 연예인, 사투리 전문배우들이 개성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사투리 능통' 능력이 연예인의 재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말달리자>에서 탤런트 조형기는 '사투리 전문배우'라며 고정 패널로 캐스팅되었다. 이문식, 김지영과 같이 조연 중에도 사투리를 잘 쓰는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젊은 연기자들이 사투리를 공부하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게 했다. 요즘 젊은 배우들에게 사투리 연기는 새로운 필수 도전 과제이기도 하다. 마치 외국어로 연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배우들의 말도 들린다. 사투리 자문단이 영화나 드라마, 방송 제작진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사생결단>의 류승범은 마산 출신 황정민이 시나리오 전체를 녹음해준 것을 토대로 현지스태프들에게 자문을 구해 익혔다. 즉흥 대사가 필요한 경우, 부산 출신 동료들과 휴대전화 녹음으로 연습했다. <국경의 남쪽>에서 연인을 두고 탈북한 음악가를 연기한 차승원에겐 북한 출신 의사가 붙어서 사투리를 지도 했고, 촬영 중엔 북한 출신 스태프가 도움을 줬다.

보통 해당 지역출신 조연연기자나 스태프가 사투리 교사를 병행한다. 별도의 교사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 촬영 현장의 도움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영화 <사생결단>은 출연 배우 외에 부산 지역 방송인이 사전 시나리오 읽기 과정을 도왔다고 한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이라고 하듯이 인터넷을 통해 많은 사투리 동호회들이 등장했다.

사투리 각광의 원인은?

<국경의 남쪽>
<국경의 남쪽>싸이더스FNH
제작자는 현실감을 살린다는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또한 소재가 다양해지고 지역적인 배경을 하는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양한 인물 군이나 캐릭터를 구성한다는 측면에서 유리하다. 한편으로는 사투리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고 표준만 중심사고에서 벗어나 사투리를 소화할만한 사회적 여건과 인식의 성숙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더 이상 사투리는 박멸의 대상이 아니다.

최근 대중문화는 유쾌 코드와 감동이 순수 키덜트 코드와 결합되고 있어 이 때문에 각광을 받는다고도 볼 수 있다. 사투리는 소수언어이자 문화유산이라는 인식 전환도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에서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이렇게 말했다.

"언어가 소멸한다는 것은 문화 생태계 붕괴하는 것이다. 언어가 사라지면서 그 언어에 담긴 지식과 문화와 예술이 사라지면 인류의 지혜와 지식이 사라진다. 각각의 언어는 인간들이 축적해놓은 지혜와 지식의 원천이자,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다. 모든 언어는 살아있는 박물관이자, 스스로 일구어낸 문화의 기념비다. 언어가 없는 땅은 심장이 없는 땅과 같다."

제주도는 이러한 인식에 따라 제주도 사투리를 세계문화유산 등록 추진에 나서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측면에서 대중문화에서 사투리가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 있다. 사투리는 지역·세대·언어 공감을 이끌어 내는 아이템이고, 대중문화 속에서 문화적 다양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단순히 인기 트렌드로서 사투리를 빌려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무늬만 사투리인 경우의 폐해다. 다양한 어휘를 보여주지 못하고 억양만 흉내 내거나 실제 현실 속의 사투리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투리들만 등장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쉽다. <맨발의 기봉이>이도 무조건 늘인다고 충청도 사투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닌가 싶다.

한편, 특정 이미지 고착 편견 조장 우려도 있다. 사투리가 조폭의 전유물로 쓰여 왔는데 아직도 여전하다. 더구나 조폭은 강원도에도 제주도에도 있다. 최근 강원도 사투리 유행은 순수에 매몰되어 지역적 편견을 낳기도 한다. 옌벤 사투리에는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도 있다.

잘못 쓰거나 불충분하면 오히려 왜곡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지역민의 반감을 사기도 한다. 어휘의 아름다움이나 말글살이를 풍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희화화시키는 데만 머물 수도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제대로 쓰지 않을 거라면 쓰지 말라는 의견도 있다.

말글살이를 풍부하게 하는 사투리를 더 발굴하고 실제 언어생활 혹은 토착 언어 관점에서 세심하게 반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영화 <황산벌>에서 '거시기'라는 단어는 무궁무진한 용례를 선보였다. 이는 사투리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대중문화 속 사투리는 답보가 아니라 풍성한 문화적 말글살이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사투리는 세계를 보는 창이다. 그 창에는 삶의 숨결이 누대로 담겨 있고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 보낸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데일리서프라이즈>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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