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지역언론 별곡-121] 5·18 광주 민중항쟁 26주년 맞는 신문들의 시각차

등록 2006.05.18 14:07수정 2006.05.18 14:07
0
원고료로 응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26주년을 맞았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부끄럽고도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4반세기를 훌쩍 넘어섰다.

총칼을 앞세운 야만적 진압에 수많은 민주시민들이 처참한 주검으로 내몰릴 당시 군부세력 앞에서 침묵을 고수했던 언론사들의 당시 카르텔은 지금도 유효한 걸까.

살인적 탄압에 맞서 스러져간 위대한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던 당시 일부 언론은 26년이 흐른 지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5·31 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이어서 망정이지 망각하고 있음은 아닌지 의심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의기소침 그 자체다.

선거종반 레이스에 무너지는 지역감정 보도준칙

총선과 대선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5·31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각 정당들이 5·18 정신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류매체들은 선거전이 광주에서 결판이라도 날 것처럼 '5·18 기념일'을 선거레이스의 막판 분수령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아직도 진상이 미완인 5·18 민중항쟁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빈축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과열된 선거보도 경쟁은 감성을 자극시키거나 지역감정의 비극적인 카드를 꺼내든 정치권의 막판 계획된 선거레이스에 휘말리고 있다. 구태를 드러내지 않겠다며 단호한 의지를 보였던 선거보도 준칙은 종반에 무너지고만 느낌을 준다.

지나친 선거 속보경쟁은 5·18 민중항쟁의 성지에서조차도 마치 썩은 거름더미를 갈퀴로 열심히 파헤치며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해부하듯 공개하는 먹레이킹 저널리즘(muckraking journalism)을 보는 듯하다.


주요 전국 일간지들은 5·18과 선거운동 돌입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에 몰려든 여야 정치권 인사들의 이모저모 등 스케치 기사에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했다.

5·18 관련기사와 사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각 당 지도부들의 광주행을 '바람 잡기', '민심결판', '전력투구' 등으로 확대 묘사하기 바쁜 탓이다.


11개 지역 일간지들과 제휴해 5·31 지방선거를 전례 없이 관심 있게 다루고 있는 <조선일보>는 '열린우리·민주 광주대전 돌입', '정동영 "한나라 석권 광주가 막아달라"', '한화갑 "망월동에 내 묏자리 있다"' 등의 기사를 통해 광주지역 민심과 표심을 <연합뉴스> 또는 <광주일보>를 대신해 전했다. 5·18 관련기사는 선거특집에 가려 눈에 띄질 않았다.

조선·동아, 5·18 관련기사보다 정치인들 말과 행동에 초점

'격전의 5·31 선거'보도를 통해 <조선>은 '또 눈물 흘리는 여'의 기사에서 "열린우리당이 서울과 경기에서 후보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집중 홍보하고 있다"며 감성정치를 꼬집는 대목이 오히려 시선을 끈다.

이에 질세라 지역 일간지 정치부 기자 또는 부장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방선거전의 판세를 분석하고 있는 <동아일보> 역시 5·18을 맞아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의 '5·18 계승자' 주장에 대해 발끈하며 총공세를 펼쳤다"는 내용의 기사와 광주를 방문한 정동영 우리당의장 및 정치권 인사들의 입과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겨레>도 5·18을 맞아 광주의 민심과 이변에 관한 의제를 집중 부각시켰다. 사설 대신 <한겨레>는 '여도...야도..."광주서 결판내자" 전력투구'란 일반기사에서 광주의 바닥민심을 놓고 막판 반전의 계기를 노리려는 각 당의 표정과 민심흐름을 분석했다. 추모열기가 가득한 광주민심을 표심과 결부 지어 해석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러나 <경향신문과>과 <국민일보> 사설은 이날 가장 돋보였다. <국민>은 '5·18을 정치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사설에서 "그 누구도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성을 훼손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전제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희생의 대가가 너무나 컸고 아직도 그때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국민>은 또 사설에서 "각 당의 지도부가 광주정신을 계승하겠다며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5·18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다"고 경고한다. 게다가 5·18 민주화 운동의 전통을 이어온 것은 정치권이 아니라 시민들이라는 점을 못 박았다.

a 한겨레는 5·18 기념일을 하루 앞둔 5월 17일 여야 3당이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았다며 여야의 광주사수 전력과 민심동향을 크게 부각시켰다.

한겨레는 5·18 기념일을 하루 앞둔 5월 17일 여야 3당이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았다며 여야의 광주사수 전력과 민심동향을 크게 부각시켰다. ⓒ 한겨레 홈페이지 화면캡쳐

국민·경향, "5·18 민중항쟁정신 정치적 이용돼선 안돼"

<경향신문>은 사설 '잊혀서는 안될 5·18 광주 민중항쟁 정신'에서 "전두환 정권의 살인적 탄압에 맞서 평범한, 그러나 위대한 시민들이 들불처럼 들고일어났던 5·18광주민중항쟁의 날"임을 상기시켰다.

<경향>은 그러나 사설에서 정당과 시민사회를 동시에 나무랐다. "5·18 가해자의 후예랄 수 있는 정당은 과연 진정으로 참회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합에 헌신하고 있는가. 결코 아니지 않는가"로 반문한 뒤, "시민사회도 광주민중항쟁 정신의 구현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전적으로 정치권에 맡겨놓은 뒤 뒤에서 따따부따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고 꼬집었다.

광주지역 일간지들도 크게 두 부류로 갈렸다. 아직도 진상이 미완인 5·18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그런가하면 잇따라 불거진 선거악재 파문과 관련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무등일보>는 사설 '5·18에 담긴 안타까움과 희망'에서 여전히 왜곡된 5·18에 대한 인식을 개탄했다.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제정되었으나 기념행사를 하는 곳은 몇 몇 도시에 불과하다"며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빨갱이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표했다.

"5·18을 정치적으로, 또는 특정지역의 정치적 정서에서 일어난 사태로 밀어붙이는 독재 군인정치시대의 수구세력이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광주는 이제 희망의 보통대명사로 자리 잡았다"며 세계 곳곳에서 민주화운동을 펴고 있는 민중들에게 희망의 횃불로 타오르고 있음을 강조했다.

광주지역 일간지, "희생자, 발포명령자 정확히 밝혀야"

<광주일보>는 5·18 기념행사와 의미를 재조명했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 있다면 광주엔 소망의 벽이 있다"는 일반기사는 특히 주목을 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 등 세계 3대 종교의 성지 예루살렘에 통곡의 벽(Wailing Wall)이 있다면 광주에는 민주성지 소망의 벽"이 있다는 것이다.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 역사의 문 뒤편에는 소망의 벽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기사에서 "소망의 벽은 진상규명 등 미완의 과제해결을 염원하고 평화와 화해 통일을 기원하는 성소가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민중항쟁 26주년을 맞는 광주시민에게는 최초 발포명령자를 밝혀내는 일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라는 표현이 무겁게 느껴진다.

<남도일보>는 사설 '아직도 진행중인 미완의 5·18'에서 "그 동안 5·18 진상에 대한 추적이 계속돼 왔으나 본질적인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희생자가 정확히 얼마인지,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 지금도 오리무중인 상황임을 더욱 안타깝게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집권 여당의 소위 인권위원장이라는 자가 5·18을 모독하고 나서 충격을 안겨줬다"며 "투쟁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계승 발전시켜야 할 때"라고 사설은 말미에서 주문했다.

"'신군부, 질서유지 차원 투입'발언 결코 용납 안돼"

이러한 맥락과는 달리 최근 일련의 선거과정에서 불거진 정치권 인사들의 발언에 여전히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 곳들이 많았다.

<전남일보>는 사설 '호남서 다르고 영남서 다른 여당의 말'에서 요즘 광주에 와서는 광주를 찬양하고 영남에 가서는 대통령의 고향을 파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대통령 측근인사의 발언을 재삼 거론했다. "표를 의식한 너무나도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사탕발림으로 호도하지 말 것"을 거듭 주문했다.

<전남매일>도 사설 '여권의 선거악재 파문'에서 "5·18 당시 신군부의 광주만행을 놓고 질서유지 차원의 공권력 투입이라고 하여 광주와 전남을 분노케 한 여당 인사가 이제는 현 정부를 '부산정권'이라고 한 바람에 엎친 데 덮친 꼴"이라고 비난했다.

"세끼 밥과 새참까지 호남에서 챙기고는 영남에서 모내기와 추수를 하려들고 있다는 빈축을 사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더 이상의 지역감정 조장과 5·18의 정략적 이용을 자제해 줄 것"을 지역 일간지들은 주문했다.

한편, <광주드림>은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5·18 전야제에서 재현된 '오월 그날'을 사진과 함께 크게 부각시킨 점이 이채롭다. 군복을 입은 계엄군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폭도로 몰며 진압봉으로 가격하는 장면과 함께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남도청 분수대에서 열린 5·18 광주항쟁 전야제 소식을 함께 다뤘다.

5·31 4대 지방선거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과 절묘하게 맞물린 5·18 광주민중항쟁 26주년은 이처럼 선거의제와 뒤범벅됐다. 그러나 5·18민중항쟁의 숭고한 정신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는 보도행태가 돋보인 하루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2. 2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3. 3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4. 4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5. 5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