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다!"

[주장] 책 <지하철을 타고서>를 추천할 수 없는 까닭

등록 2006.05.22 09:40수정 2006.05.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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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도 이 책을 보기 좋은 곳 추천 코너에 놓았다. 인터넷 서점에서도 이 책을 '강력 추천'했다. 우리 <오마이뉴스>에도 이 책에 대해 호평하는 서평이 올라왔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추천하기엔 등골이 좀 서늘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길벗 어린이'에서 펴낸 <지하철을 타고서> 이야기다. 길벗 어린이는 좋은 아이들 책을 많이 펴내어 출판사 이름만 보고도 믿고 책을 살 수 있는 출판사다. 한 집에 한 권 정도는 있을 <강아지 똥>이 바로 이 출판사 책이다.

a 호평받는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라 여러 곳에서 추천도서로 되어 있다.

호평받는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라 여러 곳에서 추천도서로 되어 있다. ⓒ YES24 화면 캡쳐

<지하철을 타고서>는 초등학생인 지원이와 유치원생인 병관이가 지하철을 타고 할머니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이들끼리 먼 곳을 찾아가는 과정을 예쁜 그림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커다란 과제를 수행하고 나면 아이들이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고 소개하고 있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독자 서평들도 "독립심을 키워줄 수 있는 책", "아이들 정서를 잘 표현한 책"이라는 칭찬이 눈에 띈다.

하지만 나는 <지하철을 타고서>를 추천할 수 없다. 세상은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해야할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누나와 유치원생인 동생을 환승까지 해야 하는 지하철 여행을 떠나보내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한다. 부모는 아이들끼리만 내보내면서 그것이 가진 위험요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책에서도 친절한 아줌마가 깨워주지 않았다면, 제 때 내리지 못했을 뻔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어른이 아이들을 데려갈 수도 있다. 어른의 동행 없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아이들은 범죄 의도를 가진 사람에게 쉬운 표적이 될 수 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지거나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에서 구르는 것 같은 안전사고는 또 어떤가?


누나에게 동생을 보호할 책임을 주었고, 그 과정을 통해 아이가 성장할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생에게 유치원생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묻고 싶다. 아이들에게 독립심을 키워줄 필요는 분명 있지만 아이들이 다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a 책 <지하철을 타고서> 중에서.

책 <지하철을 타고서> 중에서. ⓒ 길벗어린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본다면 대한민국은 외국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은 편에 속한다. 우리는 당연하게 늦은 시간에 거리를 다니기도 하지만 그런 상식이 대단히 위험한 행동인 나라가 더 많았다. 우리 생각에는 다 큰 애들을 부모가 등·하교시키는 것도 우리 상식으론 낯선 풍경이었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대개 우리는 초등학교 1학년만 되어도 찻길을 건너가는 학교라도 혼자 다니게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는 서너 살 된 아이들이 혼자 나와 노는 경우도 심심지 않게 본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아이들을 풀어놓아도 큰 문제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이런 상식과 기준들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한 해에 발생하는 미아가 몇 명이며, 뻔히 알고 지내던 동네 가게 아저씨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 사례며, 일일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생각보다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다들 공감하는 상황이다.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 아이를 안전하게 키운다는 것이 과보호하게 되거나 아이가 세상을 탐험할 기회를 막게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아이가 누려야 할 수많은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괜찮겠지'하며 넘길 수만은 없다.

아이들의 독립심을 키워줄 요량이었다면, 좀 더 나이에 맞는 과제를 수행하는 책으로 만들어졌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굳이 지하철 여행을 택하겠다면 적어도 책 뒤에 '아이들끼리 지하철을 태우면서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부모를 위한 조언 정도는 덧붙여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림책 안에 어른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어른들 중 누군가는 아이들을 지하철역까지 배웅은 해 줬어야 한다. 그리고 내리는 곳에서도 마중을 나와 주었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이런 무리한 여행을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겠지만(책에는 엄마가 제사 준비를 하느라 미리 가 있다는 설정이었다).

역무원은 아이들끼리 지하철 표를 사는데 무심히 표를 내줄 것이 아니라 보호자가 같이 있는지 확인해 주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보호자의 연락처를 확인하여 아이들끼리 여행을 나온 것이 맞는지 점검해 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좀 더 심하게 바란다면, 도착할 역에 연락하여 아이들이 무사히 도착하도록 조치해 주길 바라는 것이 우리 현실에서 너무한 요구일까?

그림책 안에 어른들이 없는 것이 아이들의 안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반영하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아이들이 마음껏 탐색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은 결국 어른들 몫이다.

a "보호자는 없니?"라고 역무원이 물어주길 바란다면, 우리 사회에서 지나친 욕심일까?

"보호자는 없니?"라고 역무원이 물어주길 바란다면, 우리 사회에서 지나친 욕심일까? ⓒ 길벗어린이

덧붙이는 글 | 장익준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장익준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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