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모두, 지금은 말을 아낄 때

박대표 피습 사건을 보며 <마스터 키튼>을 다시 꺼내 읽다

등록 2006.05.22 12:59수정 2006.05.2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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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당하고 있는 것은 선거 전략이나 정당의 운이 아니다. 기본적인 인격, 기본적인 예의가 도마 위에 올라 있다. '가만있으면 밉지나 않지'라는 속담이 딱 맞는 형국이다. 침묵하며 시간에 기대거나, 유감이나 위로를 표하면 될 일을 이런저런 말을 가져다 붙이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

조중동의 뻥튀기를 탓할 일이 아니다. 60바늘 성형 수술 운운, 지씨-박씨 분리론, 고급 수술을 받은 귀족론, 실제 수혜자 누구냐 등등 그 심정은 이해하고 나름 논리도 있을지 모르지만 말을 꺼낼수록 꺼내는 사람이 궁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이건 인격이나 예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줘야 할 상식 문제다. 화면에서 자기 성격 드러내는 연예인들은 단명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대중이 보는 곳에서는 예의 있는 척, 인격 있는 척이라도 해 주는 것이 프로라면 지켜야 할 기본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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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ASAWA Naoki

만화 <마스터 키튼>에 나오는 어느 신문 편집장은 곤경에 빠진다. 아일랜드 해방군 출신 여성이 피살당한 사건 보도에서 적나라한 현장 사진을 마다한 탓에 다른 신문에 밀린 것이다. 호통 치는 경영진이나 불만을 가진 부하 기자 앞에서도 그는 '독자를 자극시키지 마라', '죽은 이의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실어라'고 고집을 피운다.

자극적인 사진을 실은 다른 신문들이 판매 부수를 늘릴 때 그 사진을 쓰지 않은 신문은 부진에 허덕인다. 하지만 결국 숨진 여성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이 밝혀지고 누구도 만나지 못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독점 인터뷰를 자청하고 나서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는 보상받는다(만화라 가능한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위로를 전하고 수사 결과를 지켜보며 국민감정을 고려한 신중한 선거 운동을 벌이면 된다. 유세 차량을 이용한 선거가 부담스러우면 조용히 할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지지층 결집을 위한 내부 모임을 강화하면서 신중한 걸음을 보이면 된다. 인견이 중후하고 신중할 필요도 없다. 그래 보이기만 해도 된다. 적어도 굳이 나서서 수준 낮은 발언을 쏟아낼 필요는 없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입장에서야 앞장서 소리 지를 수 있는 처지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말을 아끼고 행동을 아낀다면 그게 다 남는 거고, 그게 다 버는 거다. 억측을 자제하고 이왕 앞서고 있는 선거니 지지층 다지기로 들어가면서 상황을 지켜보면 된다. 박근혜 대표가 '정치적으로 오버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처럼 말이다.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한 체니 부통령의 딸 메리는 그녀가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상대적으로 동성애 결혼을 지지하는 민주당을 공격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녀가 아버지를 위해 공화당에서 선거 운동을 할 때 민주당에서 굳이 그녀를 언급한 점에 인간적 배신감을 느낀 탓이다.

실제로 메리 체니를 둘러싼 논쟁은 미국 동성애자 커뮤니티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어 일부 동성애자들이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또 가족을 공격하는 것을 나쁘게 여기는 일반 유권자들도 영향을 받았다. 공화당 후보가 레즈비언 딸을 두었다는 악재가 오히려 공화당의 아량을 보여주는 소재로 둔갑한 것이다. 바로 상대방인 민주당에 의해서.


정치적 입장, 지지 세력을 떠나 이번 사건은 가슴 아픈 일이다. 서로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프로 스포츠 팬이라 해서 경기만 하면 난동이 벌어지는 리그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팀이 이기길 바라지만 그와 함께 우리팀이 보다 수준 높은 리그에서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봐서 정치가 '말의 예술'이라면 좋은 말을 제때 던지는 것 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말(그러나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말)을 참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모쪼록 이번 피습 사건과 이를 둘러싼 설익은 말잔치가 우리 정치 자체를 퇴보시키지 않도록 보다 신중한 대응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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