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셰어 <에너지주권>(고즈윈 펴냄)고즈윈
헤르만 셰어는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다. 독일연방 하원의원으로 1988년부터 유럽태양에너지학회 의장을 맡고 있으며 2001년 세계재생에너지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경력에 걸맞게 <에너지 주권>에선 정치경제와 연관된 오늘날 에너지위기 양상이 구체적 사례들과 함께 통합적으로 제시돼 있다.
그의 저서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현재 우리가 직면한 에너지위기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내전 격화, 이란의 핵개발 선언, 러시아와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등 산유국의 석유국유화 바람, 인도와 중국의 석유수요 급증과 이에 따른 수요불균형 등이 에너지 위기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세계유가는 배럴당 65달러와 70달러 사이에서 춤추고 있고, 심지어 배럴당 100달러~150달러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부시는 금년 초 미국의 석유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선언을 했고, 중국의 후진타오는 전 세계에 걸쳐 전방위적 에너지외교를 강화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늦게나마 에너지외교를 서두르고 있다.
중동과 카스피아해, 중앙아시아에 걸쳐 국제 가스-송유관 건설을 둘러싼 국제 경쟁과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다. 이외에 태양, 풍력, 조력, 지열, 바이오 등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에너지 문제에 대한 통합적인 관점 제공
일반 대중은 아직 당면한 에너지 위기를 절감하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문제는 정부나 거대 에너지기업과 전문가들의 몫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에너지에 관한 논의는 파편적이고 단기 대응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우리나라 정부는 관성적으로 '에너지절약'과 에너지수입원 다원화를 되풀이한다. 핵에너지 우선 정책 기조 하에 내세운 재생에너지 정책에 대해선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에너지주권>은 과학적이고 학술적인 정보와 함께 에너지를 둘러싼 정치경제적 함의를 드러낸다. 저자는 각 정보와 함께 에너지에 관한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또한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지침과 대안을 함께 제시한다.
헤르만 셰어는 에너지에 대한 인식을 전복시킬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첫 번째 그는 원자력 에너지의 위험성에 대해 핵의 평화적 이용(원자력 발전)과 군사적 이용(핵무기)의 애매모호한 경계를 지적한다. 또한 전 세계 439개의 핵 발전 시설이 확산되는 테러에 노출돼 있다고 언급한다.
원자력이 '값싼 에너지'라는 주장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값싼 원자력이 가능한 것은 정치적 지원 및 각종 면제 조치 등 특권 때문이라는 것. 지난 반세기 동안 원자력 에너지 연구개발 비용에 들어간 전 세계의 돈이 약 1조 달러에 이른다는 게 대표적 사례다.
두 번째 셰어는 교토의정서(세계 기후협약)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수준이 지나치게 낮고 협약에 포함된 '유연성 체제(flexible mechanism)'의 한계 때문이다. 온실가스 배출권, 청정개발체제 등의 경우 온실가스에 대한 면죄부 성격이 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그는 에너지 문제를 교토의정서처럼 전 세계적 논의와 합의로 해결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전 세계적 합의의 주축은 몇몇 선진국과 국가를 초월하는 거대 에너지 기업일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셰어는 요즘 각광받고 있는 수소경제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압축·저장·수송하는 데 발생하는 소모량을 제하고 나면 실제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양도 적고 경제적이지도 않다는 것. 그는 결국 수소에너지 예찬은 수소에너지 생산에 소요되는 전력을 얻기 위해 필요한 핵에 대한 숨겨진 지지라고 꼬집는다. 부시가 추진하고 있는 17억 달러짜리 수소 프로그램은 결과적으로 원자력 에너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재생에너지 확산을 위한 투쟁과 저항세력
<에너지주권>에서 셰어는 재생에너지 확산은 석유, 핵 세력과의 치열한 투쟁이란 점을 분명히 한다. 그는 거대 석유기업과 핵 발전 세력 등 기존 에너지 세력들은 여전히 태양 에너지와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 확산을 방해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즉 지금처럼 중앙 집중적인 거대 에너지 구조일 때 지금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재생가능에너지는 대형발전소를 필요로 하지 않고 지역적으로 분산된 에너지 체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현재의 에너지 권력이 반발한다는 이야기다.
셰어는 국제에너지기구(IEA)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재생가능에너지의 발전을 저지한다고 비판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현재 국제원자력기구는 전 세계적으로 핵에너지 홍보활동과 함께 각국 정부의 핵에너지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재생가능에너지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국제에너지기구 또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핵에너지 및 화석에너지가 필수불가결함을 강조하고 있다.
셰어는 생태계 보호를 위해 재생에너지 확산을 막고 있는 환경단체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겨눈다. 그는 환경단체들이 우선순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판의 균형을 잃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주장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불고 있는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의 환경영향 논란에 생각할 바를 던져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에선 환경영향과 에너지전환 사이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언급돼 있지 않다.
헤르만 셰어가 생각하는 에너지 대안은 이렇다. 국가별 지역별 차이를 인정하고 국가, 지역, 지자체별로 경쟁력 있는 재생가능에너지를 자립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그런 다양성 속에서 에너지주권 확립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즉 국가에 의존하는 대신 지역 차원에서 에너지자립에 대한 고민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책을 덮었다. 그리고 독일이 부러웠다. 우리에겐 헤르만 셰어와 같은 정치인이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전환에 대한 입장이 분명한 과학자이면서 현실적인 정치 감각을 갖춘 인물이 우리 곁에 있기를 희망한다.
에너지 주권 - 헤르만 셰어의 21세기 에너지 생존전략
헤르만 셰어 지음, 배진아 옮김,
고즈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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