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 마술에 눈 먼 정부·언론, 예고된 파국

[지역언론 별곡-125] 전북대 철학과 세미나 "산업·애국주의인가, 과학·생명주의인가?"

등록 2006.05.27 10:37수정 2006.05.2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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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을 놓고 '애국주의인가, 연구윤리인가?'를 놓고 논하고 있는 철학과 학생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을 놓고 '애국주의인가, 연구윤리인가?'를 놓고 논하고 있는 철학과 학생들. ⓒ 박주현

"지나친 애국주의는 역사를 망친다."
"그 많던 애국주의자들은 어디로 다 갔나."

지난 26일 전북대학교서는 이색 세미나가 열렸다. '산업·애국주의인가, 과학·생명주의인가?'란 주제와 '황우석 사건의 파장을 점검한다'란 부제로 시선을 끈 이 세미나는 이 대학 철학과 주최로 마련됐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웠다.

시민과 대학생, 언론인, 의사, 약사 등 3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공개 철학 세미나에서는 '과학계의 성수대교 사건'으로 비유되는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이 생명과학적인 관점 외에 철학, 사회학, 언론학적인 관점에서 고루 논의됐다.

황우석 사건, "산업·애국주의인가, 과학·생명주의인가?"

이날 세미나에서는 전북대 철학과 교수와 학생들, 전주환경운동연합 활동가, 의학계 전문가와 언론인들이 주제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특히 언론인으로는 황우석 논문사건의 보도 현장의 핵심 인물이었던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가 발제자로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전북대 철학과 김의수 교수팀이 주관한 이날 세미나는 '하이데거, 황장엽, 송두율을 말한다'를 주제로 한 지난해 1회 행사에 이어 3회째 실시된 공개철학 세미나였다.

a '황우석 사태의 전말과 쟁점'을 영상자료와 함께 상세하게 소개하는 A팀

'황우석 사태의 전말과 쟁점'을 영상자료와 함께 상세하게 소개하는 A팀 ⓒ 박주현

이날 공개 세미나는 대학생 두 팀과 시민단체 및 의학계 대표로 구성된 시민팀 등 모두 3팀의 기조발제와 언론인 주제발제, 교수, 학생, 시민이 펼치는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발제가 끝날 때마다 선보인 철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마련한 황우석 사건과 관련된 영상자료는 흥미를 돋웠다.


철학과 3, 4학년 학생들과 대원생들이 한 달 이상 준비했다는 '황우석 사태의 전말과 쟁점' '애국주의인가, 연구윤리인가?'란 두 주제는 영상자료와 함께 이채롭게 발표됐다.

학생들은 발제에 앞서 "황우석 사건은 연구 윤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정직성과 정확성, 효율성, 객관성이 모두 실종되면서 그 파장이 더욱 컸다"고 진단했다. <사이언스> 논문 조작과 김선종 연구원의 줄기세포 섞어 심기는 정직성 결여의 단면이며 연구 일지의 부재는 정확성에 위배됐다는 것.


"애국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이 연구윤리를 더욱 무시"

a 황우석 사태의 등장과 파문 전 과정에서 왜곡된 행태를 보인 국내 언론사들을 질타하는 대학생들.

황우석 사태의 등장과 파문 전 과정에서 왜곡된 행태를 보인 국내 언론사들을 질타하는 대학생들. ⓒ 박주현

아울러 연구비 편취와 난자매매 과정의 불합리성은 효율성과 객관성이 결여돼 파문을 자초한 연구라고 지적했다. 발제 학생들은 "내부 연구 고발자에 대한 보복도 과학적 부정행위로 보는 미국의 사례는 국내와 대별된다"며 "과학적 부정에 대한 엄정한 규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애국주의라는 추상적 개념 아래 연구 윤리 원칙마저 무시됐다"며 '애국주의는 역사를 망친다'는 괴테와 '애국주의는 악당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정의한 새뮤얼 잭슨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배타적 민족주의와 극우적 애국주의의 마스코트 만드는 데 열중인 언론인들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시민대표팀도 '미래산업과 생명주의'란 발제에서 "다양한 의견과 담론의 장을 마련해야 할 언론이 황우석 영웅 만들기의 도구가 되어 부풀려진 희망을 쏟아내기에 급급했다"며 언론을 질타했다.

a 시민-교수-학생-언론인이 함께 하는 황우석 공개철학세미나 자료.

시민-교수-학생-언론인이 함께 하는 황우석 공개철학세미나 자료. ⓒ 박주현

또 이들은 "대중은 진실이나 윤리의 문제보다 국익과 민족적 자긍심을 내세우며 그를 지지하기 바빴다"며 "과학계 내부의 자체 규제 미흡과 연구 윤리의 부재도 논문 조작이 가능했던 환경을 조성했다"고 비난했다.

황우석 사태는 한 마디로 과학자의 과욕과 정부, 재계, 언론, 대중, 과학계가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는 것. 한편 이날 '황우석 덫에 갇힌 언론과 과학기술'이란 주제로 발제한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는 모든 것이 '예고된 파국'이었다고 전제했다.

"정부-언론, 생명공학 마술에 눈귀 멀어, 예고된 파국"

a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가 '황우석 덫에 갇힌 언론과 과학기술'에 관한 발제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가 '황우석 덫에 갇힌 언론과 과학기술'에 관한 발제를 하고 있다. ⓒ 박주현

그는 "황우석 사태에서 보인 한국 언론의 태도는 과학기술 시대에 언론이 보일 수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극단적으로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가정했다. "'국가-자본-과학기술'이 맺은 견고한 기득권의 동맹에 언론이 한 구성원으로 참여해 적극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황우석 사태는 국가와 자본, 그리고 언론, 과학기술이 어떻게 동맹을 맺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예라고 그는 지적했다. 경제 성장의 한 원동력으로 '생명공학 마술'에 눈과 귀가 어두운 형태는 언론이나 정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2월 10일 황우석 박사의 실험실을 처음 방문한 자리에서 "기술이 아니라 마술이라 느꼈다. 동북아 시대, 2만 달러 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확실히 발견했다. 감동에 몸이 떨릴 만큼 감전됐다"고 언급한 사례를 들었다.

"과연 기자의 전문성 강화가 답인지 의문스럽다"는 강 기자는 황우석 사태 때 중요한 국면마다 그의 나팔수가 되어 엉터리 기사를 쏟아내며 여론을 오도하는 데는 수많은 전문기자들이었음을 지적했다.

a 과학계의 '성수대교사건'으로 비유되는 황우석 논문조작사건에 관한 철학세미나가 시민들에겐 이채롭다.

과학계의 '성수대교사건'으로 비유되는 황우석 논문조작사건에 관한 철학세미나가 시민들에겐 이채롭다. ⓒ 박주현

이런 사정은 언론사에 소속된 과학기술 담당 기자들이 대부분 정부·기업의 연구소, <네이처>, <사이언스> 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등 지상주의, 환상, 허상은 문화와 정신을 나약하게 할 뿐"

그는 "언론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기술 전문성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기술을 시민의 눈으로 보는 시민적 전문성"이라고 강조했다.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선회가 필요한 때임을 덧붙여 강조했다. "좀 더 빨리 비판적 과학 저널리즘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렇게 골 깊은 갈등과 분열은 없었을 것"이라는 그의 결론이다.

a 공개세미나를 주도한 전북대 철학과 김의수 교수.

공개세미나를 주도한 전북대 철학과 김의수 교수. ⓒ 박주현

이날 공개 세미나를 주도한 김의수 전북대 철학과 교수는 마지막 공개토론에서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은 서울대 조사위 발표와 검찰 조사결과 발표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여파는 상당한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이 사건이 한국 사회와 국민들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은 매우 복합적이고 심층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기를 쳐서라도 우선 확보하고 보자는 생각은 곤란하다"며 "실력을 갖춰도 뺏길 우려가 있는 것이 국제사회인데, 사기를 쳐서야 그런 것이 확보조차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1등 지상주의'가 낳은 병적인 현상으로도 보았다.

일부 토론자들은 "환상과 허상은 문화와 정신을 상대적으로 나약하게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며 생명윤리에 관한 더욱 다양한 논의와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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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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