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가 꼭 하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준비했던 투표... 선거 당일 신분증을 잃어버린 당혹감이란

등록 2006.06.01 10:55수정 2006.06.0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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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선거를 마치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이번 선거는 저에게 있어 그 어떤 선거보다도 의미가 있었고, 동시에 가장 힘들었기(?) 때문에 <오마이뉴스>의 독자님들과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 네 살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입니다. 살면서 반장선거, 학생회장선거, 아파트 동대표 선거 등 수많은 선거에 참여해보았지만, 나라에서 행하는 큰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이번 5.31 지방 선거가 세 번째입니다.


돌이켜보면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함에 있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임했던 적이 그 동안 단 한번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02년 지방선거 당시에는 놀기만 좋아하는 철없는 대학 2학년이었습니다. 선거 전날 밤, 밤새 친구 녀석들과 술을 마시는 바람에 선거 당일 늦게 일어났고, 부랴부랴 달려간 투표장에서 실수로 두 명의 후보 이름 옆에 도장을 ‘쾅! 쾅!’ 두 번 찍어버리는 바람에 귀중한 한 표를 날려버렸습니다.

또 같은 해 있었던 대선 때에는 불행히도 국내에 없었기 때문에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2004년 총선 당시에는 군복무 중이었는데, 애국심으로 완전무장되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진지한 자세로 선거에 임하였습니다.

하지만 투표용지를 ‘일발장전’하고 투표장 기표함에 들어선 저에게는 고향 땅에서 일하겠다고 나온 국회의원 후보들의 흔한 이력이나 공약 한 줄 조차 읽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었기에 후보들의 이름만을 보고 사주풀이하는 마음으로 투표를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반장선거를 할 때도 공약 연설은 몇마디 들어보고 결정하는 법인데 저의 처지는 그보다도 못했습니다.

이런 ‘굴곡진’ 사연이 있었기에 이번 5.31 지방선거에 임하는 저의 결의는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만큼이나 강했습니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한 표를 행사하고자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출마 후보들의 이력과 공약 등을 꼼꼼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보내 준 유인물을 모두 읽고, 후보 한 명 한명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약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후보들의 유세 소리가 들리면 황급히 뛰어나가 ‘참관’하기도 수 차례... 소음공해를 유발한다는 이유로 시민들의 눈총을 샀던 확성기 소리도 저에게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가온 결전의 날. 5월 31일. 아침 일찍 눈을 뜬 저는 온 가족을 깨웠습니다. 식사를 급히 하고는 가족들과 전략회의(?)도 가졌습니다.


“자. 그럼 이제 나갈까요? 아버지, 어머니는 신분증 챙기시고요.”

부모님께서 신분증을 챙기시는 동안 저도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지갑이 없는 겁니다. 앗뿔싸! 아무래도 어젯밤 술자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몇 만원의 현금과 신용카드, 그 외 중요한 명함들이 들어있었지만, 저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분증! 다만 신분증이 없어졌다는 것이 중요했을 뿐입니다. 결국 지갑도 신분증도 찾지 못하고 주민등록등본 한 장만 달랑 들고 투표장으로 향했습니다.

“저기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주민등록등본을 가지고 왔고, 여기 계신 분들이 저희 부모님인데...”
“신분증이 없으면 투표가 불가능합니다.”

순간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아, 보름간 준비해온 저의 투표 참가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엔 그간 준비했던 과정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낙심한 마음을 추스르며,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했습니다.

“신분증을 잃어버렸는데 투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신분확인을 할 방법이 없으면 구제책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무작정 집으로 향했습니다. 혹시 어딘가 박혀있을 지 모를 ‘여분’의 신분증을 찾아 방 구석구석을 뒤졌습니다. 그렇게 30분...

어디서도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좌절하고 있던 그 순간. 제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토익 성적표였습니다. ‘헉! 그래. 토익 시험 때도 여권을 가지고 가면 되잖아! 하하! 그거였어!’

그 길로 안방으로 뛰어가 제 여권을 찾아 손에 쥐었습니다. 그런데, 한 장을 넘겨보니 기간이 이미 만료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런. 다시 한번 낙담을 하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이번 선거도 이렇게 의미없이 지나가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잠들어 오후 4시가 되어 일어난 저는 책상에 다시 앉았습니다. 신분증을 찾는답시고 어지럽힌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책꽂이에 책을 꼽고 서랍을 정리하고 있던 바로 그때! 다시금 희망의 빛줄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상을 덮고 있던 유리 안쪽에 자랑스럽게 꽂혀있던 국가공인자격증! 이거다 싶어 바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했습니다. 선관위 관계자 왈 “국가공인자격증도 물론 되죠!”

군입대 전에 편한 보직 받아 보겠다고 땄던 자격증. 결국 군대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던 그 자격증이 이런 용도로 유용하게 쓰여질 줄은 몰랐습니다.

군입대 전에 취득했던 자격증. 이렇게 쓰여질 줄은...
군입대 전에 취득했던 자격증. 이렇게 쓰여질 줄은...유대근

그 길로 저는 투표장으로 달려갔고,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후보들과 당에 각각 표를 던졌습니다. 도장을 찍던 순간은 어찌나 감동적이었던지. 오후 늦은 시간, 투표장을 빠져나오면서 든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내가 이겼다.’

천신만고끝에 투표용지를 받아든 기분이란 참...
천신만고끝에 투표용지를 받아든 기분이란 참...이민정

그렇습니다. 이번 선거의 승리자는 당선된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들만이 아닙니다. 선거 전날 밤 "야외로 뜨자"는 친구들의 유혹을 뒤로하고 투표에 임했던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이 순간 저는 제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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