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지방정치판을 더럽히지 말라

등록 2006.06.02 11:58수정 2006.06.02 11:58
0
원고료로 응원
5·31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집권여당의 무능과 독선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라고도 하고, '개혁에 대한 배신으로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고도 한다.

아직도 반성을 모르는 여당 일각에서는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말로 책임을 슬쩍 국민들에게 돌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는 국민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할 뿐, 지역감정을 해소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선거 막바지에 열린우리당은 '싹쓸이만은 막아달라'며 돌아선 민심의 치마자락을 잡고 칭얼대기도 했고, '한나라당이 전국을 석권하면 국가 위기가 닥칠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국민들은 집권여당의 무성한 말잔치에 이미 진절머리가 나 있는 터라, 이러한 말들은 오히려 역효과를 부르기만 했다.

한편 마지막까지 '반성을 모르는 여당에게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표로써 보여주자'며 '노무현 정권 심판론'에 불을 지폈던 한나라당은 찢어질 듯한 웃음을 애써 참으며 표정관리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표는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민심)을 대선까지 그대로 안고 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정치 학자가 말했듯이 선거라는 제도는 '더 좋은 것을 뽑는 행위'가 아니라 '나쁜 것을 가려내는 행위'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이번 지방선거를 보면 그것을 뛰어 넘어 선거는 '증오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된 듯하다. 이번 선거 투표율이 예상과는 달리 50%를 훌쩍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든 증오를 표현하고 싶어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5·31 지방선거가 남긴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쑥대밭'이라 말하겠다. 집권 정당인 열린우리당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당 지지율과 함께 99%의 단체장을 한나라당에 내줬으니 전국이 '쑥대밭'처럼 생각될 것이다.

한나라당은 애초 기대처럼 전국을 '증오와 심판 도가니'로 만들었으니 만족할 만한 쑥대밭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러한 쑥대밭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진짜 가슴 치며 통곡하고 싶은 것은, 중앙정치판이 지방정치판을 쑥대밭으로 만든 데 있다.

지난 1991년 국민들이 30년 만에 지방정치를 부활시킨 이유는 무엇이던가. 당리당략에 매몰된 정치, 상명하복식의 패거리 정치, 민심을 이반한 따로국밥 정치로 오염된 우리나라 정치판을 지방정치라는 샛강을 살려서 맑히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정치권은 샛강에 물이 채 흐르기도 전에 중앙의 썩은 물이 역류, 전국 방방곡곡을 더럽힌 꼴이 됐다.


우리 아이들에게 먹일 급식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안전하게 만들 것인가. 가정마다 넘쳐나는 노인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토론하고 싶었지만, 정치판이나 중앙언론들이 토해내는 말은 온통 '심판'이니 '정권 재창출' 밖에 없었다.

급기야 야당 대표가 피습을 당하자 선거 막바지까지 온통 관련 기사로 도배를 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에게 지방 사람들의 생활과 복지는 관심 밖의 일이다. 그들 눈에 지방사람들이란 단지 표로 밖에 보이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국민들이 현명하다고 믿는다. 더 이상 여당의 말잔치에 놀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너무 지친 것이다. 경남에선 무소속이 한나라당을 제치고 당선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불합리한 밀실 공천에 대한 또다른 분노의 표현이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러한 분노조차도 뛰어 넘어야 한다. 선거가 더 이상 분노의 표현 수단이 아닐 때 거기서부터 희망은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4년 내내 고스란히 표를 던진 유권자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정치가 생활과 연결돼 있다는 상식을 우리는 얼마나 더 뼈져리게 느껴야 알 수 있을까.

다른 길은 없다. 지역 사람들이, 지방 정치를 꿈꾸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준비하고 차근 차근 만들어가는 수밖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 4 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5. 5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