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의 로망, 테리우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인가. 나는 포남동에 새로 오픈한 첨단 럭셔리 도서관에 다녔다. 집에서 좀 멀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는 점. 흠집 하나 없는 새 책상을 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남녀가 한 층에서 같이 공부할 수 있다는 장점 중의 장점(?)에 혹해 등록한 곳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등록한 이후로 보충학습이 끝나면 바로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도서관으로 출발. 오후 내내 도서관에서 살았고 새벽 1시나 2시에 있는 도서관 셔틀의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 시간까지 학업에 정진하였으면 오죽 좋았으련만 한창 놀기 좋아하는 때였던 만큼 나는 친구들과 수다떨기, 군것질하기, 노래방 가기, 무작정 '몰려 댕기기' 등의 잡다한 일에 몰두. 무지하게 바빠서 도저히 집에 일찍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일은 사춘기였던 만큼 역시나 남학생 구경하기! 특히 학교에서 바로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오는 고3 남학생들이 친구들과 나의 타깃이었다. 친구 중 하나가 무지하게 좋아하는 오빠가 있었기도 했지만 왠지 그 나이에는 오빠라는 이미지가 가진 어떤 환상이라는 것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꿈많고 수줍기만한 소녀 시절이었는지라 그 친구는 감히 그 오빠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네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헤벌레' 웃는 것이 고작이었고 우리들은 그런 친구를 도와준답시고 괜한 오해와 과대망상을 친구에게 불어 넣어주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너 느꼈어? 아까 그 오빠가 지나가면서 너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사실은 지나가면서 의미 없이 잠깐 쳐다본 것뿐이다- "그 눈길 정말 심상치가 않았다니까"-사실은 졸려서 반쯤 감긴 눈이었다-하는 둥의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준의 대화들이었지만 가랑잎 하나만 굴러가도 깔깔 웃음이 나온다는 십대가 아닌가. 그런 사소한 일로 '몰려 댕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들은 여느 때와 같이 고3들이 도서관으로 몰려오는 시간에 맞춰 휴게실에 앉아 '노가리를 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나 저제나 친구들과 함께 그 오빠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퍼뜩 자리에 지갑을 잊고 나온 것이 생각났다.
그 오빠를 보고 나면 언제나 밖에 나가 떡볶이나 순대꼬치 등의 군것질을 하며 또 한편의 러브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빼놓을 수 없는 절차 중 하나였기에 나는 혼자 도서실에 들어가 지갑을 찾았고 잠시 후 친구들이 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내려왔다. 코너에 위치한 계단으로 발을 막 내딛었을 때 나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고3 학생들을 볼 수 있었고 그 오빠를 보며 좋아죽는 친구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막 계단으로 발을 뻗어 올라오는 한 남학생을 보게 되었다. 아! 근데 이게 웬일인가~ 그 순간 시끌시끌하던 도서관의 소음들이 갑자기 단단한 방음벽이라도 해놓은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친구들의 모습도 다른 학생들의 모습도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토요일 한낮이었음에도 갑자기 도서관 로비는 순간 까만 암흑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도 아닌데 그 남학생의 주변만이 선명한 광채로 빛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시간이 멈춰버린 줄로만 알았다. 계단을 내려갈 생각도 그렇다고 올라갈 생각도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 올라오는 그 남학생의 눈을 얼빠진 듯이 바라보았다. 몸을 움직이지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3-4초간의 짧은 시간이었을 그 시간에 나는 단지 정지된 시간 속에서 미소를 지을 듯 말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저 내 눈을 응시하며 올라오는 그 남학생의 모습만을 강하게 각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 남학생은 이미 도서관 내로 들어가 버렸고 그때야 도서관 로비는 빛과 일상의 소음들, 그리고 움직임을 되찾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 느낌은 바로 첫눈에 반하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저 어떤 남학생을 보고 귀엽다, 잘생겼다, 멋있다, 하는 그런 느낌과는 다른 잊을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이었기에 나는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고 내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남학생을 무지 좋아하기 시작했고 고3이라는 것, 우리 동네에 산다는 것 정도의 간단한 정보를 그 남학생의 학교 후배들에게서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남학생의 신발장 번호를 입수한 나는 그날부터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학생이 올 시간쯤에 삶은 계란부터 우유, 주스, 초콜릿 등의 갖가지 간식들을 신발장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우렁각시처럼 멀리 서서 친구들과 함께 남학생을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매일 금쪽보다 귀한(?) 간식들이 자신의 신발장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알아차린 남학생은 무척 놀랐지만 은근히 기분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한동안 간식이 나오는 신기한 신발장은 도서관의 화제가 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 남학생의 성이 안씨라는 것을 알고 그 남학생을 '테리우스 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 친구들도 모두 "테리우스가 오늘~" "테리우스가 아까~" 하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간식 고르는 일을 낙으로 삼기 시작했다. 비록 내 입으로 들어갈 것도 아니지만-그 당시 간식은 나에게 무지 중요한 것이었다-내가 먹을 간식까지 테리우스가 먹고 든든해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다양한 폭의 간식을 시도했다. 그리고 신발장에서 음료수나 간식을 꺼내 벌컥벌컥 마시는 테리우스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했다.
하지만 옛 속담은 역시 틀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보기만 하면 히쭉히쭉 웃는 내 친구들과 언제나 주변에서 뱅글뱅글 도는 나를 보며 테리우스는 점차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여러 루트로 정보를 수집하던 통에 정보원들까지 입을 열어 테리우스는 간식의 주인공이 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챙피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는 테리우스를 볼 때마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얼굴을 바로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기만 친구들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히려 잘됐다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나는 테리우스와 1:1 대면시간을 갖게 되었다.
테리우스: 간식 정말 잘 먹었어
수줍은 나: 네~(모기만한 소리로)
테리우스: 2학년이야?
수줍은 나: 네에(얼굴 빨개져서)
그저 "네"라는 소리에 고개 푹 숙이고 있는 것이 전부였던 대화지만 그 날의 대화는 정말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나에게는 황홀한 시간이었다. 그 날 이후 간식은 신발장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테리우스에게 직접 전달하는 직거래 루트로 바뀌었고 우리는 볼 때마다 인사를 나눈다든가 대화를 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그 이상은 도무지 발전하지 못했다. 수험날짜가 얼마 안 남은 수험생이기도 했으려니와 테리우스는 나를 캔디로 생각하지 않고 낸시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매일 테리우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던 나에게 어느날 불행이 밀어닥쳤다. 엄마가 도서관을 동네 가까운 곳으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바락바락 고집 쓰면 계속 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도서관을 옮겼는지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정말 참기 힘든 슬픔이었다. 마지막 작별의 날, 나는 테리우스와 또다시 1:1 대면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수줍은 나: 저 도서관 옮겨요..
테리우스: 그래?…
수줍은 나: ……
테리우스: 공부 열심히 해… 너도 이제 고3이잖아…
수줍은 나: 네에~(역시 모기만한 목소리)
슬픔에 잠겨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보며 테리우스는 교복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증명사진 한 장을 꺼냈다.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찍은 테리우스의 사진이었다. 그 순간 너무나 감격한 나는 자칫 눈물까지 흘릴뻔했다.
테리우스: 내 사진이야… 너 가져…
감격한 나: 너무 고마워요. 수능 꼭 잘 보세요.
테리우스: 그래 고맙다.
감격한 나: 근데 오빠! 혹시 학교는 정하셨어요?
테리우스: 글쎄 아직….
감격한 나: 그럼, 과는요?
테리우스: 응. 정했어
감격한 나: 무슨 과인데요?
테리우스: 글쎄…
감격한 나: 말해 주세요
테리우스: 그건…
망설이던 남학생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고 이렇게 말했다.
"탑 씨크릿…" 그리고 유유히 뒤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아~~ 이렇게 멋질 수가…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렇게 끝 만남까지 멋지게 장식한 '테리우스 안'은 그렇게 내 앞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테리우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은 채 다른 도서관에서 열심히 친구들과 '몰려 댕겼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를 통해 테리우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하나 입수하게 되었다.
바로 테리우스의 진짜 별명에 관한 정보였다. 우리가 매일같이 '테리우스 안'이라고 불렀던 그 남학생의 별명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바로 '안서방'이었다.
안서방… 안서방…
그때는 참 가당치도 않은 별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테리우스'라는 별명보다는 '안서방'이라는 별명이 더욱 어울리는 외모였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구는 김용만을 닮았다고 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렇게 좋아했던 테리우스였건만 이제는 왠일인지 이름조차 기억나지않는다. 게다가 그 금쪽같던 증명사진도 어느 쓰레기통에 굴러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가끔씩 그리워진다. 말도 안 되는 연애 드라마 쓰느라 바빴던 오도방정 그 친구들과 그리고 예뻤던 내 사춘기. 이 자리를 빌어 귀여운 추억을 만들어준 안서방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안서방!!!! 도대체 이름은 뭐였지….
덧붙이는 글 | <민중의 소리> 블로그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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