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문제를 다루기 위한 6자회담 한국측 수석대표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오른쪽), 미국측 수석대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왼쪽), 일본측 수석대표 야부나카 미토리 외무성 아시아·태평양국장(가운데)이 한국대사관에서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배재만
길게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이후, 짧게는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이후 악화일로를 걸었던 미국-이란 관계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다.
이란과의 대화불가 노선을 고수했던 부시행정부가 대화에 나서겠다며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포기하면 보상책 제공에 참여할 수 있다 하고, 이란 역시 6개국 협상안이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니 바야흐로 이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이에 반해 이란 핵문제보다 덜 까다로울 것으로 예상됐던 북핵문제는 교착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부시행정부가 대이란 정책을 수정하고 나섬으로서 '이란 변수'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힐, 평양에 갈 수 있을까?
우선 관심의 초점은 이란과 직접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부시행정부가 북한이 요구하고 나선 직접대화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모아진다. 부시행정부는 줄곧 이란과의 직접대화를 거부하다가 안팎의 비판 여론이 비등해지자, 인센티브 제공 및 대화 의사를 밝혔다. 정확한 의도를 판단하기는 이른 감이 있지만, 부시행정부의 입장이 점차 후퇴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시행정부가 이란과의 직접대화 의사를 밝힌 다음날인 6월 1일, 북한은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평양으로 초청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 협상을 수용하지 않을 방침"이라며 "미국정부는 북한과의 협상은 6자회담을 통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무부 고위 관계자들은 북한의 제의를 분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힐 차관보의 방북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백악관과 국무부 사이에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때마침 한미 양국은 북한의 제의에 대해 협의에 들어가 그 결과가 주목된다.
힐의 방북을 통한 북미간 직접대화의 성사 여부는 이란 핵문제의 향배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미국과 이란 사이의 대화가 성사돼 이란 핵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는다면, 미국 안팎에서는 '북-미 직접 대화 유용론'이 강해질 수 있다. 또한 이란 핵문제 해결의 진전은 부시행정부 내에서 비교적 대북 온건파에 속하는 국무부의 위상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석유가 '있는' 이란과 '없는' 북한
그러나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이란 핵문제의 향배를 쉽게 점칠 수 없을뿐더러, 부시행정부가 이란 핵문제에 진전이 있다고 해서, 대북정책을 수정하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부시행정부가 이란과 '대화 모드'로 선회한 배경에는 이란에 대한 제재가 효과를 거두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이란 제재가 부메랑이 되어 미국경제도 강타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반면에 부시행정부는 이란처럼 대량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보유하지 못한 북한에 대한 제재는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효과적인 카드일 뿐만 아니라, 미국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거의 없다고 판단해왔다. 특히 미국내 강경파들은 대북 금융제재의 효과에 한껏 고무되어 있다.
또 한가지 차이는 유럽연합 3국과 한국 및 일본에 있다. 부시행정부가 대이란 정책을 바꾸는 데에는 유럽연합의 설득과 압박이 주효했다. 유럽연합의 요구를 무시할 경우 미국의 동맹구조에 파열음이 생길 수 있다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보고가 부시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한일관계는 독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으로 엉망이다. 미국의 핵심적인 아시아 동맹국들인 한일 양국이 함께 부시행정부를 설득해 북한과의 직접대화 수용 등 대북정책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상실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