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을 중심으로 사회가 재편되고 있는 요즘 언론과 지식인,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감 넘치는' 필력(筆力)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언론이라는 매체를 통한 글쓰기는, 사태나 사물의 양상을 살피기 위해서는 모든 차원의 관점을 동원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애써 무시한 채, 월드컵 신드롬의 '단면'만을 차례차례 보여줌으로써 '욕을 먹더라도'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상황이다. 관심(interest)은 곧 이익(interest)이기 때문이다.
월드컵 신드롬에 대한 해석의 갈등
월드컵 신드롬 속에서 히틀러식의 나치즘, 혹은 ("이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파시즘이 발견된다느니, 순수한 응원문화가 4년이 지나 상업주의와 결탁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느니, 또 질서정연했던 응원집단이 시민의식의 무장해제를 선언해 길거리에 온통 쓰레기만 난무했다느니, 사실 '여흥과 풍류'의 민족인 우리가 월드컵을 통해 또 하나의 '별신 굿'판을 벌이는 것이라느니, 월드컵이 언론의 주요 아젠다로 설정됨으로써 중요한 의제들(FTA, 노근리, 사학법 개정, 국민연금,.. 중요한 의제는 수없이 많다)이 소외되고 있다느니, 별의 별 해석들과 비판들이 생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모든 해석과 모든 비판들이 일면에서는 타당하고, 그렇기에 또 다른 시각에서는 부적절할 수밖에 없어, 자신의 시야와 입장을 정하지 못한 대중들로서는 '우왕좌왕' 혼동할 수밖에 없어 순간적인 판단이 실린 가벼운 댓글들만 난무하는 6월이다.
월드컵 응원 열기에는 분명 '광기'가 발견된다. 하지만, 우려할 수준도 아니다. 그 광기가 '훌리건'식의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최근 강남에서 섹스행위를 흉내낸다거나 하는 등의 현상들이 길거리에서 보이고 있지만, 이것은 월드컵 때문에 드러난 현상이 아니다(나이트클럽이나 여러 음지에서 종종 관찰되는 것들이 잠시 표면으로 부상한 것이 아닐까). 게다가 축구 경기가 끝나면, 대다수의 시민들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흥분을 애써 누른 채,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다.
오히려 월드컵의 광기를 비판하는 안티 월드컵에서 '광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물론, '축구 경기 보러 집나간 정치적 이성을 찾는다'는 문화연대의 안티 월드컵 전략은 시의적절했고, 꼭 필요한 지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보다 복잡한 심리 기제가 있겠지만, 중학생 수준의 심리분석을 동원하자면, 월드컵 신드롬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대중 심리로 보이기도 한다(심리학 전문가들은 내 단순한 생각을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또, 민속학자들은 줄다리기 시합, 씨름판, 별신굿판 등 일종의 잔치 내지는 축제 형식의 장이 마련될 때마다, 대규모의 사람들이 그 현장에 몰려가 크게 다치기도 했다는 기록을 보여준다. 붉은 악마 거리 응원이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사에 무지한 언론은 4년 전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길거리 응원 문화'라고 호들갑을 떨며 타블로이드성(선정적인) 기사를 생산하고 있다. 물론, 현대적 축제 양식에서 드러내는 여러 양상이 조선, 구한말, 일제시대에 퍼져있던 민속의 축제 양식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정 해석에 대한 권위 부여가 폭력 양산해
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사실 글이 길어지면 지루할 것이므로, 여러 해석의 지점들을 매거하여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월드컵의 상업주의성 비판(서울시 광장얘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월드컵 자체가 원래 상업주의를 동반한다), 파시즘을 방불케 한다는 박노자식의 비판(파시즘 운운 하는 이야기는 박노자가 제일 먼저 꺼낸 이야기다. 타당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정작 중요한 의제들이 사장되고 있다는 공론영역의 전일화(全一化) 경향 비판(이런 비판 역시 긍정적이지만, 평소에 시민들이 평택이나 FTA, 개정사학법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가), 축구시합을 통해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타자를 배제시킨다는 민족주의적 비판(민족이라는 개념의 허구성도 동시에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등 4년 전부터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판과 다양하지만 단선적인 해석들이 모두 '어떠한' 지점에 있어서는 '타당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기만의 입장과 관점이 서면 그 해석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다른 해석이나 판단이 타당한 지점을 애써 짓밟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러한 해석들의 갈등과 교차 속에서 특정 해석에 권위를 실어줌으로써, 다른 해석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폭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데리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태도는 '현전(presence)의 형이상학'을 부활시켜, 여성과 남성, 서양과 동양, 자아와 타자, 선진국과 후진국, 검은 피부와 하얀 피부, 친미와 반미, 빨간색과 파란색 등 다양한 이분법을 양산해내고, 특정 항목에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제 2의, 제 3의 폭력을 지속적으로 야기 시킨다.
우리는 선배들의 무덤 위를 밟고 서있다. 죽음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한 그들의 피와 땀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민주화된 이후의 민주주의를 보다 정치(精緻)하게 유지해야 할 역사적 현장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성'에 파묻힌 사이버공간의 댓글문화 속에서는 반민주적인 싸늘한 기운이 맴돌고 있으며, 나는 월드컵이라는 문화적 기호(sign)를 접하는 시민들의 태도가 또 하나의 정신적 폭력으로 의미화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모든 해석과, 모든 상상력에 권력을 주어야 할 시점이다. 그 권력(Macht)은 낮은 수준의 권력(power)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