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보다 맛이 더 훌륭하더라.주경심
얼마 전,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건강검진'이란 걸 받았습니다.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생겨서도 아니고, 삶에 여유가 생겨서도 아닙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더니, 주사라면 도리질을 치며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던 제가 노니까 염불하는 마음으로 공짜로 생긴 검진권을 들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두 팔을 걷어 붙이고, 피를 세 팩이나 뽑는데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은 겁니다.
물론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지요! 섬마을에서 자라 하루 세끼를 온갖 싱싱한 해산물과 생선을 먹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넓어지다 못해 떡 벌어진 이 골격이 저의 건강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건강하다고 자부했던 제가 '저혈압'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유난히 머리가 자주 아프고, 아무리 피곤해도 쉬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던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자각증상도 없었는데…. 고혈압보다 더 위험한 저혈압이라니 얼른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동네 약국으로 뛰어가 평소 눈길 한 번도 주지 않던 혈압계에 왼쪽 팔을 쑤욱 집어넣었습니다. 측정 결과는 '89/56'이었습니다. 약사는 "이렇게 낮게 나올 리가 없다"며 다시 한 번 재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두 번째 결과 역시 처음과 별반 차이가 없는 '98/62'였습니다. 저혈압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병인지에 대해 장장 한 시간에 걸친 연설을 약사에게 듣고서도 모자라, 저는 "잘 먹고, 꾸준한 운동을 해야한다"는 특단의 처방까지 듣고서야 약국을 나섰습니다.
아픈 것도 아니고, 안 아픈 것도 아닌 이 얄궂은 병을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털어놨습니다. (흑염소 한 마리 공짜로 얻어먹어 볼까하는 기대도 솔직히 없진 않았습니다.)
친정 엄마는 "예전에 막내를 낳고 저혈압이어서 보약 한재 먹고 좋아졌다"며 저에게도 보약을 해 먹으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것 또한 얼른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왜냐고요?
저희 친정엄마 한 때는 허리가 27의 날씬한 몸매였습니다. 그런데 약발을 받은 후 지금까지 계속 '허리 34'를 유지하고 계시거든요. 저의 망설임의 이유를 단박에 잡아내신 엄마는 "허기사, 보약 먹으면 나맨치로 살이 쪄서 빠지도 안헐 것이다, 그러믄…"하고는 한참을 망설이셨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드디어 특단의 조치를 제게 내리셨습니다.
"아파서 묵는다는디 누가 뭐라 허겄냐? 보약이 싫으면 술을 터라!!!"
"술 마시면 좋아져요?"
"술을 마시면 얼굴이 화끈화끈 해지는 것이 혈액순환이 잘 될 것 아니냐. 긍께 보약이 싫거든 오늘부터 술을 한잔씩 해봐라!!"
그 어이 싫겠습니까!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남편을 만나기 전만 해도 저녁마다 병나발로 리사이틀 공연을 하던 술집이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의 '알코올 마니아'였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바른생활 사나이'인 남편을 만나 술을 끊은 지 어언 8년이 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