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밤 12시 이재민 대피소의 모습. 이재민들이 잠을 자고 있다.선대식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김복순(75·평창군 진부면 구리)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불 꺼진 체육관에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잠을 청하고 있었지만 김 할머니는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지금 3일째 뜬눈으로 할아버지와 손자를 기다리고 있다.
김 할머니는 집중 호우만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고통이다.
"지난 토요일, 집이 인근 야산에서 떠내려 온 토사에 완전히 묻혔어. 잠을 자다 물과 토사가 덮치는 순간 할아버지, 손자와 함께 겨우 몸만 빠져 나올 수 있었지."
할아버지는 지병이 악화돼 원주의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곳에는 둘째 아들과 손자가 함께 가 있다. 김 할머니 역시 골다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김 할머니에게 가장 힘든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다.
김 할머니는 "작년 강릉에서 죽은 막내아들이 생각나서 힘들다"며 "지난 15일 흙더미에 묻힌 집은 최근 생활이 어려워진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손주를 맡겨와 함께 살아 온 집이었다"며 울먹였다.
김 할머니는 얼마 전까지 직접 만두를 만들어 인근 가게에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제 김 할머니는 돌아갈 곳이 없다. 또한 현재 김 할머니의 재산은 입고 있는 옷 한 벌이 전부다. 이런 할머니의 생활이 언제 끝날 지 아무도 모른다.
김 할머니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는 손자 박원빈(7)군 이야기를 꺼냈다. 박군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박군이 얼마 전 자신에게 한 말을 전하며 박군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했다.
"제가 이다음에 커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좋은 옷 많이 사드릴게요. 그때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돼요."
30대 마을 주민 대표의 고단한 일상
"지난 토요일부터 지금까지 새벽 3시에 누워 오전 5시에 일어난다."
19일 새벽 2시, 체육관 입구에서 수해 임시대책본부의 마을 주민 대표인 황정구(36·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씨를 만났다. 황씨를 비롯해 40~50대 '청년' 10여 명이 200여 명의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황씨는 이재민 대피소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민원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래서 황씨는 이재민들 중 가장 늦게 자고 가장 빨리 일어난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집이 무너지거나 물에 잠긴 사람들이다. 하지만 현재 이 분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모두 60~70대 노인들이다. 하루 빨리 삶의 터전이 복구되길 바라고 있다."
황씨 역시 이번 수마의 피해자다. 황씨의 집은 물에 잠겼고 감자와 배추가 심어져 있던 밭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황씨 역시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 지 걱정부터 앞선다.
황씨는 폭우로 사망한 친구의 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세상을 떠난 친구의 동생이 강릉의 한 병원 영안실에 있는데 아무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 황씨는 자신의 피해보다도 동생과 집을 함께 잃은 친구를 안타까워 했다.
"지금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비가 그쳐도 문제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흙더미에 묻힌 집들은 대부분 30~40년 된 황토집인데 이런 집들은 복구를 못한다. 황토가 약해져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황씨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잠든 새벽 2시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황씨는 전기시설을 점검하고 강당 내 주민들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황씨는 "오늘도 3시가 넘어서야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