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을 바라보며 추억을 떠올리다

두물머리는 지금 연꽃의 향연

등록 2006.07.28 16:23수정 2006.07.2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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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두 손 모아 합장하듯 솟아있는 연꽃 봉오리. 채 피지 않아 더 고운 것은 아닐까?

두 손 모아 합장하듯 솟아있는 연꽃 봉오리. 채 피지 않아 더 고운 것은 아닐까? ⓒ 최성수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 차가 양수리 근처를 지나는데 다리 아래로 환한 등불 같은 것들이 스치듯 눈에 띈다. 얼핏 보니 연꽃들이다. 늘 스쳐 지나기만 한 곳 양수리, 생각하면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남아 있던 어느 한 시절의 기억이었던 양수리를 향해 나는 얼른 차를 돌린다.


이제 그 시절은 지나가 버리고

1950년대에 태어나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 같은 세대는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뒤 세대의 386이니 뭐니 하는 특성조차 제대로 이름 받지 못한 우리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최고의 선인 줄 알고 교육받았고, 유신 시대에 대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받은 교육의 허상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숨 막히는 장기독재의 체재에 막막해 하면서 어쩔 줄 모르던,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닌 세대인지도 모른다.

a 연잎에 맺힌 물방울. 그 물방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넉넉해 진다.

연잎에 맺힌 물방울. 그 물방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넉넉해 진다. ⓒ 최성수

뒤 세대인 386이 가지는 이념적 치열성도 없이, 그저 막연히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던 우리 세대는 양심적 고뇌를 젊음의 무기로 삼았던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가끔 양수리를 떠올린다. 그러나 양수리를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상징적 장소로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제어할 수 없는 젊음의 열기와, 그 젊음을 가로막는 숨막히는 사회 체제에 아득해 질 때면 마치 도피처처럼 찾던 곳 중의 하나가 양수리였고, 대성리였으며, 새터이고 강촌이었다. 그러니 우리 세대에게 양수리는 대성리의 다른 이름이었고, 또 새터나 강촌의 별칭이기도 했다.

어느 가을날, 주위의 친구들은 하나 둘 군대로 끌려갔거나 감옥으로 갔던 그 무렵, 나는 양수리 다산 묘를 하릴없이 걷고 있었다. 다산 묘 들어가는 길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고, 길 가로 늘어선 밤나무에선 툭툭 밤송이가 떨어지곤 했다. 그리고 나는 외로웠다. 생이란 얼마나 지루하고 아득한 것인가를 아마 그 때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사회가 영원히 지속될 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내게 그런 생각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a 연곷 가득 피어 양수리에 여름 온다. 연밭에 새 한마리 날고 있다.

연곷 가득 피어 양수리에 여름 온다. 연밭에 새 한마리 날고 있다. ⓒ 최성수

광주항쟁 1년 뒤의 여름날도 선명하다. 그해 여름의 며칠을 나는 텐트를 치고 북한강 가에서 보냈다. 아침이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안개가 밀려왔다. 가지고 간 꽁치 통조림과 밑반찬, 쌀이 거의 떨어져 갈 무렵이었다. 내일은 돌아가야지, 하며 새벽 강가에 앉아 나는 하염없이 안개 짙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서로 어깨를 떠밀며 밀려가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짙은 안개 속에서 웅얼웅얼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이승의 말이 아닌 것처럼 안개와 뒤섞여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안개의 말 같은 그 소리의 정체는 그물을 걷으러 온 동네 사람들이었다. 부자간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안개 속에서 그날의 어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소리를 안개가 내게 건네던 위안 혹은 격려의 말로 기억한다.


어쩌면 나는 절망과 혼돈의 때마다 양수리를 찾아 삶의 위안을 얻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 87년 유월 항쟁을 전후한 사회적 변동의 시기, 개인적으로는 막막하고 답답한 교육 현실에 절망하던 교직 초년생이었던 나는 그 어느 겨울날에도 양수리에 가 흔들리던 마음을 곧추 세운 적이 있었다. 그 무렵을 기억하는 어느 시에서 나는 양수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a 곧 만개할 듯 환하게 웃는 자련. 세상 무엇이 저 꽃보다 고울까?

곧 만개할 듯 환하게 웃는 자련. 세상 무엇이 저 꽃보다 고울까? ⓒ 최성수

양수리에 가서 보았다, 강물은 어떻게 숨쉬는가
어떻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 몸으로 흐르는가
언 강을 뚫고 봄은 누구의 가슴으로 오는가
쩡쩡거리며 때때로 울음소리를 내는
겨울 강은 어디까지 흐르는가
한나절쯤 매운바람 속에 숨 몰아쉬면
세상은 거저 살아지는 게 아니지
힘차게 달려와 부서지는 물방울도
이처럼 넉넉히 산과 들을 안을 줄 안다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겨울 양수리
사람들 모여 밭 일구고
땀 흘리며 사는 이 세상살이가
제 몸 제 살만 위함 아니듯
남쪽 강 북쪽 강 한달음에 흘러들어
휘돌며 춤을 추는구나
무슨 댐 무슨 골짜기 길을 막아도
넘고 돌아서 만나는구나, 얼싸 안는구나
너는 백두 멸악 금강을 넘고
나는 소백 노령 차령을 건너
이제 여기에서 손잡는구나
그래, 그런 것이지, 만나야 할 것들은
꼭 만나는 거지
나뭇등걸 바위그루터기에 긁혀
멍들고 피 맺혀야 만나는 거지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
찬바람 더욱 기승을 부려도
나는 깨어있다, 온갖 굴욕과 부끄러움을 참으며
깨어 이처럼 만나는 강물을 본다
물속에 살아 숨 쉬는 물고기를 본다
양쪽 강이 실어오는 봄을 본다
봄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얼음장 밑의 물고기들 살 부비며
제 몸의 비늘 하나라도 떨구어
두터운 얼음장 녹일 때 온다
반 넘어 언 강물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으며 겨울이 가고
흘러 제 안으로 깊어지는 양수리에서
나는 눈 시퍼렇게 뜨고 보리라
강물이 어떻게 숨쉬는가
봄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남과 북이 어떻게 만나 얼싸안고
신명나는 춤을 추는가
함께 열리는가를
-졸시 <양수리에서> 전문


이제 그 시절은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먼 길을 걸어왔고, 세월은 흘러갔고, 세상도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정말 내가 꿈꾸던 그 시절이 온 것일까? 그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자꾸 고개가 가로 저어진다. 그렇다면 그 시절은?

a 물에 닿을듯 피어있는 수련. 엎드려 피는 것들은 다 사소하면서도 아름답다.

물에 닿을듯 피어있는 수련. 엎드려 피는 것들은 다 사소하면서도 아름답다. ⓒ 최성수

양수리를 지날 때마다 그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게 되고, 양수리의 막막함과 위안이 동시에 되살아난다. 그래, 어쩌면 양수리는 나에게는 그 시절의 낟가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들길을 걷다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를 피해 숨어들어갔던 아늑하고 따뜻했던 옥수수 낟가리 말이다.

양수리에는 연꽃이 한 세상을 이루고

차를 몰고 두물머리로 들어선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점을 말한다. 깔끔하게 정리된 강가의 호수에는 연꽃이 한창이다. 한쪽에는 백련(白蓮)이 다른 한쪽에는 자련(紫蓮)이 서로 마주보며 눈웃음 짓는 두물머리는 한가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a 다 핀 꽃, 피려는 꽃, 아직 때를 기다리는 꽃.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임을 연꽃이 말해주고 있다.

다 핀 꽃, 피려는 꽃, 아직 때를 기다리는 꽃.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임을 연꽃이 말해주고 있다. ⓒ 최성수

나는 두물머리 연꽃 공원을 걸으며 천천히 연꽃을 바라본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한 것처럼 아직 피지 않은 연꽃의 모습도 곱고, 다 피었다 지고 연밥만 남은 것도 아름답다. 만개해 호수에 제 모습을 비춰보는 연꽃들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커다란 연잎에 또르르 구르는 물방울도 보기 좋다.

다시 길을 나와, 조금 남쪽의 세미원으로 간다. 그곳 역시 연꽃 천지다. 물에 붙어 피어난 수련의 작고 은은한 모습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중국 송(宋 )나라의 문인 주돈이(周敦頤)는 <연꽃을 사랑하는 이유(愛蓮說)>에서 연꽃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세상에 피는 꽃들 중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아주 많다.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당나라 이후에는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이 특히 많았다.

나는 연꽃을 유난히 사랑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나왔지만 진흙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잔잔한 물결에 씻겨 요염하지도 않다. 꽃 대궁의 속은 텅 비어 있으며 줄기는 곧다. 넝쿨로 뻗지도 않고, 가지도 없다. 향기는 멀리에서 더 맑으며, 곧게 서서 꽃이 피니,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서 만져볼 수는 없다.

국화는 속세를 떠나 숨어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모란은 부귀를 추구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연꽃은 군자를 상징하는 꽃이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연명 이후에 거의 없다. 나처럼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모란을 사랑하는 것이 세속에 비춰 마땅할 지도 모른다.


a 활짝 핀 연꽃 속에 숨은 연밥도 곱다.

활짝 핀 연꽃 속에 숨은 연밥도 곱다. ⓒ 최성수

주돈이는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고고한 절조를 지키는 군자를 연꽃에 비유했다.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세속의 욕심도 없으며, 자신의 의로움을 굽히고 타협하지도 않고, 올곧은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되니 연꽃을 군자에 비유할 만하다.

주돈이의 글을 생각하며 돌아보는 세미원의 연꽃은 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너무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게 배어있는 색깔은 보아도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커다란 연잎의 넉넉함도 그렇고, 그 연잎에 또르르 굴러 모여 있는 물방울도 마음속의 응어리를 다 풀어주는 것 같다. 물과 꽃의 거리를 한 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낮게낮게 가라앉으며 피어있는 온갖 수련들은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a 물과 어울려 또 다른 세상을 만들며 피어있는 수련의 수수하고 고운 자태

물과 어울려 또 다른 세상을 만들며 피어있는 수련의 수수하고 고운 자태 ⓒ 최성수

a 연꽃은 진흙에서 나왔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단다. 그래서 더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걸까?

연꽃은 진흙에서 나왔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단다. 그래서 더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걸까? ⓒ 최성수

양수리 하면 지나간 한 시절의 기억으로 늘 가슴이 먹먹해 지던 것들이 연꽃을 보니 다 사라지는 것 같다. 이제는 그 기억 속의 아련함 때문에 이름만 되뇌이며 양수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연꽃에 둘러싸인 양수리의 오후 속에 앉아있다. 아, 어쩌면 그 기억 속의 양수리는 이렇게 찬란한 연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내 청춘의 한 장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저렇게 여리고 은은한 꽃 한 송이쯤 피워낸 것은 아닐까?

a 연잎과 연꽃이 그득한 양수리의 세미원. 싫도록 보아도 질리지 않는 연꽃을 만나러 양수리로 가자.

연잎과 연꽃이 그득한 양수리의 세미원. 싫도록 보아도 질리지 않는 연꽃을 만나러 양수리로 가자.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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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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