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읽기] 장맛비 같은 영감의 세례를 받다

<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이중섭 -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한국편 2>

등록 2006.07.31 14:51수정 2006.08.01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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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과 친해지려 애쓰며 그림에 관한 몇 편의 책을 읽었지만, 그림은 여전히 내게 갑갑한 어떤 대상이다. 미술관에 가지 못하는 건 생업에 쫓기는 일상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도 두려움의 대상이던 그림이 한편으로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독서 경험을 줄 정도로 이젠 그림과 많이 친근해졌다는 위안이 드는 건 다행이다.

마지막 장맛비의 위세가 대단하던 날들에 폭우보다 더한 영감의 세례가 내게 쏟아졌다. 모처럼 들른 책방에서 이중섭과 만난 것. 이중섭은 저항할 수 없는 홍수처럼 내 심연의 둑을 일거에 허물어뜨리며 들이닥쳤다. 이중섭이 퍼부은 예술혼의 물벼락에 나는 허우적거릴 수도 없었다. 그의 그림 속에 빠져들어 이대로 숨이 멈추는 것은 아닌지 때때로 걱정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홍수처럼 나를 무너뜨린 이중섭의 예술혼

누구나 이중섭이란 이름 석 자 정도는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중섭을 알고 있다 말하자니 켕기는 구석이 많아 이내 불안해진다. 사실 기자 역시 언론에 보도되는 단편적인 수준의 이중섭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내게 <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이중섭 -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시리즈 한국편 2>은 이중섭의 그림에 담긴 영혼의 울부짖음과 처절한 몸부림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책은 위인전 형식을 탈피했으며 서양 사람이 쓴 책의 번역본도 아니다. 우리 미술학자의 눈으로 보고 우리 감성으로 느낀 미술책이다. ‘미술이란 무엇일까’, ‘그림이란 어떤 예술적 영감과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되었나’ 하는 물음에 대한 성실한 답변이다.

작품, 작가의 생애, 창작 당시 사회 배경이 이 책의 세 축이다. 이 책은 그 셋의 관계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작품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다. 화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작품들을 수록, 감상의 폭을 넓히도록 편집돼 있다. 책은 이중섭의 연대기 형식이면서도 생애보다는 작품 관련 내용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해설을 쓴 저자의 관점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독자의 눈으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또한 책의 중간 중간에 미술사조, 예술의 경향, 관련된 이들에 대한 소개와 짧은 해설 등을 삽입해 미술 전반에 눈뜰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1장은 유년기부터 일제 치하에서 성장하고 미술에 입문한 시기를 다고 있으며('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소'), 2장에는 다니던 미술학교의 후배로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의 그림들이 담겨 있다('사랑의 엽서 그림'). 한국전쟁에 따른 피난과 이념의 충돌에 갈등하는 이중섭의 모습은 3장('떠도는 삶 속에서 피운 꽃')에 담겨 있다.

불우한 가운데에서도 작품에 몰두하던 전쟁 후 몇 년간을 다룬 4장('쏟아진 걸작들)과, 부조리한 현실과 어긋난 운명의 회오리 속에서 끝내 가족을 잃어버린 채 요절하는 말년의 모습이 담긴 5장('돌아오지 않는 강')이 그 뒤를 잇는다.


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소/1953~1954무렵/종이에 유채/32.3*49.5cm
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소/1953~1954무렵/종이에 유채/32.3*49.5cm아이세움
흰 소/1953~1954년 무렵/종이에 유채/30*41.7cm/홍익대학교 박물관
흰 소/1953~1954년 무렵/종이에 유채/30*41.7cm/홍익대학교 박물관아이세움
떠받으려고 하는 소/1953~1954년 무렵/종이에 유채/34.4*53.5cm/호암미술관
떠받으려고 하는 소/1953~1954년 무렵/종이에 유채/34.4*53.5cm/호암미술관아이세움

그림, 불우함에 맞선 예술혼의 결정체

기자는 이중섭의 불우한 생애와 처참한 삶의 이력에 대해서는 독자들 스스로 책을 읽고 파악해야 할 몫으로 남겨놓을 작정이다. 미술에 관한 책이고 다루는 주제가 이중섭의 그림에 관한 것이기에, 이중섭의 중요한 작품 몇 편에 대한 기자 나름의 인상을 소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중섭의 작품을 소재별로 구분하면 일제 치하와 분단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얼굴을 그린 그림과 소를 비롯해 닭이나 까마귀 같은 새를 그린 그림, 피난 시절 및 정서적 안정기이던 통영 시절에 그린 풍경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주제별로 구분할 경우 작품들은 그의 생애의 파고와 부침에 따른 시기적 구분과도 맥을 같이한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수난과 저항 정신을 담은 그림, 분단과 이념의 충돌에 아파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표현한 그림, 전쟁 후 이승만 독재의 현실을 비판하는 그림, 마사코를 향한 연정과 북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나타내는 그림, 어긋난 운명으로 일본의 가족들과 생이별한 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그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섭하면 떠오르는 게 소 그림이다. 이중섭의 분신 같기도 한 소 그림은 이 땅의 굴곡진 역사의 분노와 오욕을 상징하기도 한다. 책에서 맨 처음 만나는 '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소'는 다음에 나오는 '흰 소'나 '떠받으려고 하는 소'와 마찬가지로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대비되며 소의 힘찬 역동성과 힘을 느끼게 한다. 또한 부릅뜬 눈이며 벌어진 콧구멍에서는 대상을 향한 분노와 거친 호흡이 느껴진다.

아마도 분단과 전쟁, 독재 치하에서 살아야 했던 이중섭 자신의 분노이자 저항이었을 것이다. 핏빛 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소는 이념을 맹신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자, 출세를 위해 협잡하는 무리들에 대한 통렬한 일갈이기도 하다.

물고기가 그려진 소/1951년/종이에 연필/26.5*33cm/개인
물고기가 그려진 소/1951년/종이에 연필/26.5*33cm/개인아이세움
현실에 대한 저항이 소의 전신에서 묻어나고 배어난다면, 서귀포 피난 시절에 그린 '물고기가 그려진 소'는 모처럼 찾은 정신적 안정을 반영하듯 순박하고 온순하기 그지없다.

다음에 나오는 '부부' 혹은 '투계'라 불리는 그림을 이 책의 저자는 '봉황'이라 이름 지었다. 기자 역시 이 그림을 보면서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의 현실, 분단에서 비롯된 이산의 아픔을 느낀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향한 이산의 아픔을 누구보다 아프게 경험한 이중섭이었기에 '어머니가 있는 가족'이어야 온전한 가정이라고 화가는 말한다.

봉황/1954년/종이에 유채/51.5*35.5cm/개인
봉황/1954년/종이에 유채/51.5*35.5cm/개인아이세움
어머니가 있는 가족/1953~1954년 추정/종이에 유채/26.5*36.5cm/개인
어머니가 있는 가족/1953~1954년 추정/종이에 유채/26.5*36.5cm/개인아이세움
달과 까마귀/1954년/종이에 유채/29*41.5cm/호암미술관
달과 까마귀/1954년/종이에 유채/29*41.5cm/호암미술관아이세움
또한 그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생이별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보낸 부인과 자식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지 않았던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닭과 가족', '꽃과 새와 물고기, 끈이 있는 가족'으로 혹은 친구인 소설가 '구상네 가족' 같은 작품으로 태어난다. '달과 까마귀' 역시 가족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아니고 무엇일까.

엽서 그림 혹은 은박지를 긁고 그 위에 색을 덧입힌 그림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 그림들에는 대부분 아이들과 새와 게 등이 등장한다. 이중섭이 꿈꾸던 세상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소박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운명은 그 소박한 꿈마저 이중섭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중섭 작품 속의 인물들은 고개가 모두 젖혀져있거나 꺾여 있다. 좌절된 꿈 혹은 비틀어진 운명의 장난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바닷가 언덕의 두 아이/1952~1953년 무렵/알루미늄 박지에 유채/10*15cm/개인
바닷가 언덕의 두 아이/1952~1953년 무렵/알루미늄 박지에 유채/10*15cm/개인임흥재
세 사람/1942~45년/종이에 연필/18.2*26.4cm/개인
세 사람/1942~45년/종이에 연필/18.2*26.4cm/개인아이세움
소년/1942~1945년/종이에 연필/18.5*26.4cm/개인
소년/1942~1945년/종이에 연필/18.5*26.4cm/개인아이세움
그의 앞에는 언제나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의 돌개바람이 불었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현실들이 그를 정신병자 같은 지경에 빠지도록 몰아갔다. 그래서 그는 똑바로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인물들에게 목이 없는 것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가져다준 절망 혹은 허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기다린다. '세 사람'에서처럼 잠들지 못하고 '소년'에서처럼 그 앞에 난 길에 앉아서.

서귀포 피난시절과 전쟁 후 통영에서 보낸 시절은 모처럼 이중섭이 심리적 안정을 찾은 시간이었다. 그 때 많은 풍경화들이 탄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중 특히 기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남해의 '충렬사 풍경'과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이었다. '서귀포의 환상'과 이중섭 그림 중 가장 대작인 '도원'은 바로 그와 가족들이 함께 가고자 한 파라다이스였음이 분명하다.

그림을 보는 눈과 느낌이 다 같을 수도, 같아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작가가 처했던 상황과 발 디디고 섰던 시대 배경 등을 참고삼아 작가의 의도를 훔쳐보려는 노력은 의미 있다 할 것이다.

어차피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들의 것이며 시대가 지나면 지나는 대로 해당 시대의 숨결과 정신에 따라 이해되고 해석되면 족한 것. 그림에 대한 기자의 인상을 감히 드러내는 것 또한 위에서 말한 이유에서 용기를 얻었음이다. 그림과 더 가까워지는 일상은 여러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리라 확신한다. 이중섭이 내게 퍼부은 영감의 세례가 여러분의 것이기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꽃으로 그린 악보
이중섭이 그린 방명록의 그림을 보고 지은 김상옥의 시

▲ 김상옥 시집<의상>의 출판 기념 모임에서 이중섭이 방명록에 그린 <복숭아를 문 닭과 게>

꽃으로 그린 악보/김상옥

막이 오른다. 어디선지 게 한 마리 기어 나와 거품을 품는다. 게
가 뿜은 거품은 공중에서 꽃이 된다. 꽃은 복숭아꽃, 두웅둥 풍
선처럼 떠오른다.

꽃이 된 거품은 공중에서 악보를 그리다 꽃잎 하나하나 높고 낮
은 음계, 길고 짧은 가락으로 울려 퍼진다. 소리의 채색! 장면들
이 옮겨가며 조명을 받는다.

이 때다. 또 맞은편에선 수탉 한 마리가 나타난다. 그는 냄새를
보고 빛깔을 듣는다. 꽃으로 울리는 꽃의 음악, 향기로 퍼붓는
향기의 연주-

닭은 놀란 눈이다. 꼬리를 치켜세우고 한쪽 발을 들어올린다. 발
까락 관절이 오그라진다. 어찌 된 영문이냐? 뜻밖에도 천도복숭
아 가지가 닭의 입에 물린다.

게는 연신 털난 발을 들고 기는 옆걸음질. 거품은 꽃이 되고, 꽃
은 음악이 되고, 음악은 복숭아가 되고, 그 복숭아를 다시 닭이
받아 무는 - 저 끝없는 여행! 서서히 서서히 막이 내린다.

덧붙이는 글 | 이중섭의 그림을 더 감상하시려면 기자의 홈페이지에서 갤러리>>아트갤러리를 클릭하세요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시리즈/아이세움

외국편1-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외국편2-돌에서 영혼을 캐낸 미켈란젤로
외국편3-창조의 수수께끼를 푼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국편4-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 피카소
외국편5-빛의 유혹에 영혼을 던진 렘브란트
외국편6-청동에 생명을 불어넣은 로댕
외국편7-춤추는 세상을 껴안은 화가 브뢰겔

한국편1-조선의 풍속을 그린 천재 화가 김홍도
한국편2-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이중섭
한국편3-신선이 되고 싶은 화가 장승업
한국편4-붓으로 조선 산천을 품은 정선
한국편5-김정희(근간)

덧붙이는 글 이중섭의 그림을 더 감상하시려면 기자의 홈페이지에서 갤러리>>아트갤러리를 클릭하세요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시리즈/아이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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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편4-붓으로 조선 산천을 품은 정선
한국편5-김정희(근간)

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이중섭 - 한국편 2

최석태 지음,
아이세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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