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잔칫상에 올릴 돼지 새끼들이다"

[내 젊음을 바친 군대 2] 생도 시절

등록 2006.08.11 10:50수정 2006.08.1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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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도 그리며 갈망하던 사관학교 입교일이 드디어 다가왔다. 할아버님과 아버님께 큰 절을 올리고 동리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득의양양해진 나는 광주행 버스를 타기 위해 면소재지인 원동리까지 갔다.


어머님께서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오셔서 "조심해라! 매사에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 말씀을 해 주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웜매! 참말로 잘 되었소잉!"이라며 어머님과 내 손을 잡아주셨다. 어머님께서는 "다 덕택입니다, 그냥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랍니다!"라며 겸연쩍어하셨다.

지방의 합격자들은 입교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대부분 미리 서울에 올라와, 학교 앞의 배나무 밭이 있는 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들어갔다. 모두 기쁨에 상기된 얼굴이었다. 유난히 목소리 크고 찐한 경상도 사투리와 정감 넘치게 말꼬리가 긴 전라도 사투리가 어울려 왁자지껄했다.

포항에서 올라 왔다는 빼빼마른 친구가 "나 조○○입니더! 형씨! 어디서 왔심니꺼!"하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약간 거만스런 모습으로 악수를 청해왔다. 다음날 같은 분대원이 된 그는 동작이 워낙 굼뜨고 사투리가 심해 기압을 많이 받긴 했지만, 인간미 넘치는 좋은 친구였다.

교문에 들어서니 전투복을 입은 3학년 생도가 '요놈들, 혼 좀 나봐라'하는 분위기였다. 3학년 생도들은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띠며 우리를 안내했다. 모두들 싱글벙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각기 분대장 생도의 뒤를 따라 배정된 내무반에 들어갔다.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침대 위에는 우리가 사용할 보급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던 구두가 두 켤레(검은색과 갈색)나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Made in U.S.A.' 딱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물품들이었다. 팬티부터 양말, 체육복, 손수건, 실내화, 운동모, 운동화, 필통, 연필, 지우개 등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거기 다 있었다. 너무나 가난에 쪼들려서 가지고 싶었지만 엄두도 못 냈던 것들이었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학비 걱정, 밥 걱정 등 궁핍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분대장 생도들이 우리를 재촉하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이발소에서 머리를 짧게 깎고 깨끗이 샤워하고 나니 암울하고 고단했던 과거를 깨끗이 흘려 보내버린 것처럼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졌다. 들어올 때 입고 있던 옷, 신고 있던 신발과 가지고 온 물건을 모두 집으로 보낸다며 걷어갔다. 고달프고 어려웠던 슬픈 시절과 완전히 단절하고 희망과 기쁨의 세계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해방감이 온몸에 젖어들었다.

아버님의 과거 때문에 끊임없이 감시당하듯 쫓기는 마음으로 살고, 물질적으로 너무나 어려웠던 청소년시절을 보낸 내게 사관학교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가슴을 펴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 고된 훈련과 엄격히 통제된 생활도 내겐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어두운 장막이 거치고 희망의 밝은 해살이 찬란하게 나를 비출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사관학교는 오랜 세월 동안 움츠리고 살아온 나를, 기세등등하고 고집스러웠던 초등학교 3학년 이전의 본래 내 모습으로 되돌려놓았다.

상급생도들로 구성된 근무생도들이 우리를 훈련시켰다. 우리는 각자 고유번호인 교번을 부여받았다. 상급자가 "귀관!"하고 지적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쪽을 향해 빳빳이 서서 가장 큰 소리로 "예! 1686번 표명렬 생도"라고 고함을 질렀다. 내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러댔던지 지금도 내 교번을 기억하는 동기생들이 많다. 내가 최후의 힘까지 남김없이 다 쏟아 처절하게 절규하는 모습은 명물이 되어 상급생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내 처참한 꼴을 보기 위해 간부 생도들이 일부러 우리 내무반에 와서 "귀관!"하고 집적거리며 지적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생도들처럼 나도 결코 군인이 좋아서, 군인으로서 꿈을 안고 사관학교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졸업한 뒤 장교로 평생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소대장, 중대장이 되고 장차 장군이 되고' 등에는 사실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나는 군인으로서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다. 강대국과 권력자들에게 짓밟히고 당해온 불쌍한 민초를 위해 목숨 바쳐 무엇인가를 이뤄야겠다는 막연한 꿈이었다. 불의가 판쳐온 세상을 바로잡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비전이었다.

잔칫상에 올릴 돼지

생도 시기, 내가 사관학교에 입교한 목적, 생도로서 존재 이유, 비전에 대해 진정성을 두고 심각히 토론하는 훈육 과정은 거의 없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수도 없이 외쳤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도덕적 용기를 배양하기 위해서는 면밀히 계획된 훈육 제도에 따라 투철한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이것은 불가능했다. 민족이라는 낱말에 공포심을 품는 친일반역도들이 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관생도 훈육 중 가장 중요한 기초군사 훈련과정에서도 바람직한 훈육제도를 형성하는 일이 무척 어려웠다. 기초군사 훈련 당시 근무 생도들은 우리를 정신없이 몰아세우는 데는 이력이 나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해골처럼 딱딱하고 표범처럼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너희들은 장차 나라에서 필요할 때 언제든지 잡아서 잔칫상에 올리기 위해 살찌우면서 기르는 돼지 새끼들이다."

부리부리한 눈에 돼지처럼 콧구멍을 벌름벌름하던 중대장 생도의 거친 목소리는 늘 우리를 섬뜩하게 했다. 왜 하필이면 돼지 새끼들이란 말인가! 그래, 우리가 장차 '만족한 돼지'처럼 배만 부르면 아무 고민도 없이 살만 퉁퉁 쪄 살아갈 것 같은 치사한 존재들로 보였단 말인가?

고향 마을에서는 명절 때나 잔칫날일 때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돼지를 잡았다. 새끼줄에 네 발이 묶일 때 돼지는 온몸을 퍼덕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식칼에 목이 찔려 피를 흘리며 버둥버둥하던 돼지는 결국 체념한 듯 눈만 크게 뜨고, "푸우푸우"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잦아들면 사람들은 절구통에 펄펄 끊는 뜨거운 물을 붓고 숨 끊어진 돼지를 밀어 넣어 면도하듯 털을 뽑았다. 그렇게 죽던 돼지의 최후모습이 눈에 선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신세라는 말인가?

기왕 돼지 이야기를 할 바에는 이렇게 격려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훗날 조국이 부를 때 마지막 살덩이 한 점, 피 한 방울, 뼈 한 조각까지 송두리째 민족의 제단에 바치기 위해 귀관들은 여기 모인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완전한 희생, 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그러나 중대장 생도의 말투와 표정 어느 부분에서도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나친 자격지심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너희를 이렇게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학사 학위까지 취득할 수 있도록 공부하게 해 주는 이유가 있으니, 알아서 기면서 똑똑히 처신하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한마디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엄포로 들렸다.

그 잔칫날이 내겐 너무 빨리 닥쳐왔다. 강원도 건봉산 앞에 있던 험준한 비무장 지대의 중대장 직책을 맡아 물불 가리지 않고 근무하고 있던 1965년 여름, 갑자기 전출 명령을 받았다. 전투부대 제1진으로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었으니 즉시 홍천의 맹호 부대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항간에는 전투요원으로 가면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 미국에서 '베트남은 1965년도에 졸업한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출신 초급 장교들의 무덤'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미군 장교가 많이 희생됐다.

거진, 간성을 지나서 터덜거리는 0.75톤 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며 이제 다시는 이보다 더 동쪽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산과 들과 나무와 바윗돌에서 풀포기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와 이별해 슬프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인생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사관학교 4년의 훈육은 전쟁터로 가는 내게 정신적인 어떠한 경구도 들려주지 않았다. 목이 잘린 채 혀를 내밀고 있는 제사상의 돼지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게 큰 힘을 준 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라며 어머님께서 냉전의 소용돌이에서 허물어져 가는 집안을 지켜보시면서 가슴으로 들려주시던 말씀이었다.

구 일본식 군대문화의 바탕은 그대로 둔 채 미국식 제도를 꿰어 맞춘 뒤, 한 번도 근본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돼온 사관학교 훈육제도를 시급히 개혁해야 한다.

인간존중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철학과 신념, 인성을 지닌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도록 생도훈육 방식을 바꿔야 한다. 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일제의 앞잡이들은 사관생도들로 민족의식이 유입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 오로지 전투적 기능인으로만 생도를 육성하는 데 혈안이었지만, 이젠 그런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

생도들은 감수성이 많고 정의감이 있는 젊은이들이다. 좋은 인재일지라도 훈육을 잘못 받으면, 합당한 사회적 대접을 받기 어려운 사람밖에 될 수 없다. 미국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을 서로들 모셔가려는 까닭을 명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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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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