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오이냉채주경심
연일 최고기온을 갱신하며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날씨에도 남편은 그늘 한 점 없는 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냉장고에서 얼음물 꺼내마시며, 선풍기 바람이라도 쐬고 있는 입장으로서는 더워도 덥단 말 하기가 미안할 뿐만 아니라, 덥다고 투정을 부린다는 것 자체가 사치일 것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냉수로 샤워를 하며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것 외에는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많이 덥죠?"
"여름은 더워야 제 맛이지. 견딜만 해!"
"더위 먹으면 안되니까, 한낮에는 어디 그늘에라도 숨어 들어가 있어요. 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맥없이 땡볕에 서 있지 말고."
마음만 같아서는 보약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입던 옷도 훌훌 벗어던지는 계절 탓에 기름값 대기도 빠듯한 매출 때문에 미안한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을 말 한마디로 대신 전해본다.
"나는 걱정 말고, 너나 더운데 괜히 전기요금 아낀다고 선풍기도 꺼놓고 그러지 마! 애기 땀띠 난 것 보면 안 봐도 어쩌고 있는 줄 알겠다만은 어른은 참아도 애들은 못 참으니까 선풍기라도 틀어줘 알았지."
"알았어요."
웃을 때가 아니면 어디가 입인지 구분도 안 갈 만큼 새까맣게 탔으면서도 오히려 집에 있는 나를 더 걱정해주던 남편이었는데, 무쇠라도 녹일 이 더위에 그 누군들 버틸수가 있겠는가? 그제 어제 남편의 발걸음이 부쩍 지쳐보였다. 점심 먹으러 갈 시간도 없다며 미숫가루를 타 달라던 남편이 어제는 그나마도 안 먹고 고스란히 남겨온 것이다.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진 어깨가 맛난 거라도 사 먹었으려니 하는 나의 지레짐작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왜 안 마셨어요?"
"더워서 아무것도 입에 안 들어가더라. 물만 계속 마셨더니 속이 다 울렁거린다."
남편은 저녁상 역시 반도 비우지 못했다.
"반찬이 먹을만한 게 없지?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해봐요. 내일은 만들어 놓을테니까?"
"생각나는 것도 없는데? 그리고 날도 더운데 만들기는 뭘."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입에 밀어넣는 걸로 남편은 허전한 저녁을 끝냈다. 설거지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니 낮에 받은 열기 때문에 언제나 저녁상 물리기가 무섭게 잠이 들던 남편이었건만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내 발이 무안하게 남편은 잠 대신 애먼 다리만 벅벅 긁고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라며 남편은 얼른 다리를 감추었지만 억지로 끌어다 본 남편의 다리에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 좁쌀만한 땀띠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얼마나 가려웠을지. 집으로 돌아올 무렵 일부러 전화를 해 와서는 밥맛도 없는데 오랜만에 고기나 먹을까 하는 남편에게 내야 할 세금만 줄줄이 읊었던 내 입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얼음을 꺼내와 살살 문질러 주었다. 나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 남편은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 꿈이 현모양처라는 거 잊었어?"
남편은 아침 일찍 또 장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푹푹 전해오는 열기에 웬만하면 오늘은 집에서 쉬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납기일을 넘긴 것에서부터, 납기일이 다가오는 고지서들이 줄줄이 나를 향해 있으니 물만 두 병 챙겨서 나가는 남편을 잡지도 못했다.
아마 남편도 집에서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는 그 어색함이 더 싫었을 것이라고 내 멋대로 결론도 지어버렸다. 대신 힘든 하루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남편에게 더위를 날려줄 시원한 그 무언가를 준비해 놓는 걸로 미안함을 대신해 보려 한다.
"맛있어서 먹냐? 시원해서 먹지!"
작년 이맘 때쯤에도 남편은 땡볕 아래서 일을 했고, 그런 남편을 위해 저녁마다 나는 더위를 날려줄 오이냉채를 준비했었다. 먹는 모양이 얼마나 복스럽던지 난 나의 요리 솜씨를 전혀 의심치 않으며 "그렇게 맛있어"라고 물었고, 남편은 너무나 순진한 얼굴로 철없이 물어오는 내게 오이냉채보다 더 싸한 대답을 날려왔었다. 맛보다는 시원함 때문에 들이킨다는 그 오이냉채.
올해는 시원함에 맛까지 가미한 제대로 된 오이냉채를 만들어서 남편의 더위를 씻어줘볼 생각이다. 왜 진즉 오이냉채를 생각하지 못한 건지. 이것도 다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한다며 나를 너무 배려한 남편 때문이다. 물만 주면 크는 콩나물처럼 하루종일을 손 한번 가지 않고 잘 커주는 아이들인데.
"더울 때는 오이냉채가 최곤데"라고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대령하는 이 마누라를 아무리 더위에 지친 남편도 한번은 귀여워 해주겠지? 오늘은 "그렇게 맛있어"라고 묻지 않으련다. 대신 얼음 한 덩이를 더 띄워주련다.
오이냉채가 뭐 얼마나 시워하랴만은 그 안에는 오이, 미역 말고도 얼음을 넣어주며 남편이 무사히 이 여름을 보내길 바라는 나의 진심어린 걱정이 묻어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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