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8.15의 기억> 표지한길사
"사실 15일에 해방 사실을 안 사람은 몇 명 안 됩니다. 그날 서울 큰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독립이 되었다는 사실, 일본이 망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건 그날 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일본 천황의 방송이 몇 번 되풀이되었지요. 우리말로도 방송하고 해설도 해주었어요. 그렇게 하니까 16일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어요. 정말 서울 시내, 누가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전부 길거리로 나왔어요. 그리고 제대로 된 태극기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그리도 급히 만들었는지 형형색색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어요." - 문제안(본문 중에서)
일제시대, 경성방송국 취재기자로 활동했던 문제안(85)의 생생한 증언이다. 8ㆍ15 당일은 워낙 정신이 없었고, 독립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도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에서야 천황의 항복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위의 광경을 상상하니 나도 몰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제의 감시와 핍박을 받으며 힘겹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유 선고'를 받은 기분이 얼마나 꿈만 같았을까?
그렇지만 독립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안이 근무하던 방송국에서만 해도,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말 방송을 제1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상부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미뤄지던 한국말 방송은, 1945년 9월 9일부터 제1방송으로 전파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문제안은 이러한 이유로 "진정한 한국 방송은 1945년 9월 9일 오후 5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방송 KBS의 로고는 'This is the key station of the Korean Broadcasting System, Seoul Korea'에서 따온 것으로, 미군정 사람들이 만든 것이므로 다른 로고로 바꾸어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 이야기한다.
두 번째로 서북청년회 활동을 했던 손진의 증언이 이어지는데, 그가 얘기한 '민족과 국민의 차이점'이 머리에 와서 쏙 박힌다.
"'국민'과 '민족'을 구분해야 된다는 거지요. 만일 민족만 놓고 생각할 것 같으면 같은 민족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에 살던 일본 놈들이 미국 국민으로서 싸운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말입니다. 민족이 내 생명, 내 재산을 보호해 주는 게 아니에요. 국민이죠. 국가가 망하면, 일제 때 봤잖아요. 그때 우리가 어디 민족이 없었어요? 주권을 빼앗기니까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길이 없는 거예요." - 손진(본문 중에서)
자연발생적인 '민족'과 의식을 가지고 단결한 '국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기세등등하던 일본이 패망 후 소련군에게 당했던 치욕적인 목격담을 털어놓는다. 일본인 수용소에서 소련군 장교가 일본 아녀자를 겁탈하는 등 기세등등하던 일본인들도, 나라가 망하자 약자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지금도 아리랑을 자주 부른다는 오오카와 키요시가 증언한 부분을 읽다 보면, 패망 이후 조선인들에게 보복당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반일감정 때문에, 이 책에 일본인의 증언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게 느껴졌지만 계속 읽다 보니 그 역시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가 종전 후 부모님을 찾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당시 2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일 뿐이었다.
전쟁에 관한 처참한 이야기들... 기막히고 가슴 아파
전쟁에 관한 묘사가 너무나도 사실적인 책 구절구절이 나를 기막히고 속상하게 했지만, 재미나게 읽어 내려간 부분도 꽤 있었다. 한국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을 제작했던 만화가 신동헌과 을지로에서 미용실을 운영했던 미용사 김옥진의 증언이 특히 흥미로웠다.
충무로 구석에 앉아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던 신동헌의 그림은, 만화 기술이 무한히 발전한 지금 보아도 꽤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드는 명화였다. 경기가 나빠서 하루 이틀 굶는 건 보통이었고, 물만 먹으면서 일주일 계속 굶을 때도 있었다는 신동헌. 그렇지만 그런 악조건을 노력으로 극복해,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좌익 세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당시 시사만화는 대체로 비판적인 좌익 쪽에 가까웠지만 나는 이북에서 소련군의 행패를 익히 보아왔기 때문에 좌익을 그렇게까지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때의 경향이라는 게 언론도 그렇고 좀 똑똑하다 싶으면 좌익적인 색채를 띠었습니다. 우익은 별로 인기가 없었죠. 좌익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은 6ㆍ25를 겪고 나서 달라졌어요. 전에는 상당히 이상적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북 사람들 행패를 보고는 아니구나 깨달은 겁니다. 6ㆍ25가 끝난 다음에는 민심이 많이 달라졌어요." - 신동헌(본문 중에서)
'파마 한 번 하는 데 쌀 한 말 값을 지불하자고 할 때였다'고 이야기하는 제1기 미용사 김옥진. 그녀는 당시 시설 부족으로 인해 파마를 하다가 머리를 홀랑 태워버린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그 당시 미용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시작하기 전에는 집안의 숱한 반대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미용사의 길을 걸어 큰돈도 벌고, 미용사중앙위원회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어려운 시기에도 미용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던 그녀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미용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같은 사건이라도 증언하는 이에 따라 다른 기억이 되기도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같은 상황이라도 그 사람의 당시 처지에 따라서 얼마든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구 사건(1946년 10월 1일 발생한 사건으로 경찰관 60명, 민간인 54명 사망). 같은 경우, 기억하는 이에 따라 '항쟁'이 되기도 했고, '폭동'이 되기도 했다. 각자 입장에서 너무도 확고한 어투로 당시를 회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까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이 책만 읽어서는 객관적인 시선을 갖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ㆍ15를 직접 겪은 이들의 체험을 육성으로 듣는 것 같은 생생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지만, 개인의 주관적인 기억(그것도 너무 오래된)에 의존해서 구성되어 있는 점은 이 책이 갖는 한계라고 생각한다. 대구 사건과 같은 경우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다른 역사서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개운한 느낌보다는 앞으로 더 많이 알아가야겠다는 의지가 솟아났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고, 그렇기에 올바른 사관을 세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능시험에서조차 국사과목이 선택으로 바뀌어버린 현실 속에서, 얼마나 올바른 사관을 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변지혜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8.15의 기억 -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
문제안 외 39인 지음,
한길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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