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묵채가 되기 전.주경심
갑자기 찾아온 감기몸살로 남편이 사흘 동안 앓아누웠다. 늦더위의 열기로 작은 방안은 찜통을 방불케 하건만 이불 속에 들어간 남편은 연신 춥다는 말만 내뱉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남편은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만 자댔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은 통하지도 않았다. 약을 먹으려면 죽이라도 한술 떠야 한다고 통사정해도 남편은 손사래 쳤다.
완전히 애가 따로 없었다. 혹시나 먹을까 싶어 이것저것 해다 바쳐보지만, 남편은 여전히 잠에 취한 채 먹지 않겠다고만 한다. 아픈 것만 아니라면 잔소리라도 해주련만,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타들어간 내 속은 기어이 잿덩이가 되어버렸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타는 속도 속이려니와, 아픈 사람은 그렇다 쳐도 나라도 요기를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바로 우묵이었다.
어릴 적 태풍이 지나가면, 가재도구가 멀쩡한지 살핀 다음 기다란 장대를 들고 선창에 나가는 게 우리 일이었다. 그곳에서는 해일과 밀물에 밀려 선창에 들어오는 청각, 미역, 우무가 '나 잡아봐라'하는 식으로 술래잡기라도 하듯 물 밖으로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며 어린 우리의 애간장을 녹였다.
철사를 휘어서 만든 고리를 칭칭 동여맨 긴 대마무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리면, 늘어진 여름 해는 금세 서산을 넘어갔고 빨간 함지박을 든 엄마는 우리가 건져놓은 해초를 담아 집으로 나르셨다.
미역은 아버지가 잡아오신 감성돔이나 양태와 함께 미역국을 끓이고, 청각은 잘 말렸다가 김장할 때 넣으면 시원하고 알싸한 맛을 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엎어져도 모를 지경이었다.
우무는 여름 햇빛에 며칠 뒤집어가며 말려주면 본래 색깔인 갈색은 온데간데없고, 하얗게 색이 바랜다. 망에 넣고 쓱쓱 문질러 잡티를 털어낸 우무를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두어 시간 동안 푹 고았다 식히면 바로 우묵이 탄생한다.
거기에다 잘 불린 백태가 끓을 때 불을 끈 뒤 절구에 쓱쓱 갈아서 만든 콩물을 넣고, 얼린 얼음을 한 양푼 통째로 털어 넣고 간을 맞추면 '참살이' 식품 콩물우묵채가 완성된다.
칼로리는 없고 장만 깨끗하게 청소해준다는 우묵채! 생전 우스갯소리를 모르던 아버지도 우묵채를 드실 때면 농을 하시곤 했다. "이거 한 그릇이믄 서울까지도 간다. 우묵은 들어갈 때 그대로 나오니께, 배 고프믄 도로 씻어 묵으믄 된당께!"
우묵채 그릇은 금세 바닥을 보이고, 팔이 짧아 눈앞에서 못 건진 우묵가사리 한줌이 그렇게 아까울 수 없는 순간이었다. 뭐든 잘 먹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씹을 것도 없이 후루룩 넘어가는 우묵채를 좋아하던 자식들에게 엄마는 해년마다 잊지 않고 백태와 우묵을 만들어 보내주신다. 지천에 먹을 게 천지고 돈만 주면 뭐든 사먹을 수 있는 편한 세상이지만, 여름이면 나 역시 엄마의 우묵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냉장고 안에 들어가 있던 우묵이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콩물을 갈고, 우묵을 채로 썰고, 얼음을 띄우고, 통깨도 뿌렸다. 작은 집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냄새에,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취해 있던 남편도 깨어났다.
"출출하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남편은 우묵채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한 그릇 더 줘 봐!!" 나 혼자 먹으려고 딱 두 그릇 만든 우묵채지만, 남편이 이거라도 마시고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싹싹 담아 줬다.
그 덕인지 남편은 오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일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