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탄신 130돌 기념-상] 생애 편... 국치일에 당신을 생각하며

등록 2006.08.28 21:09수정 2006.08.2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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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백범 김구 선생백범기념관
8월은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달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났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광복절로 기립니다.

또한 8월은 나라를 잃은 달입니다.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전부에 관한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는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어버린 국치일의 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은 날 못지 않게 잃어버린 날도 기억하면서, 다시는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몹시 분해하면서 새 각오를 다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치일은 거의 모든 달력에는 표기도 되어 있지 않고, 관공서나 학교, 언론에서도 어물쩍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픈 기억을 새삼 들추고 싶지 않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광의 역사도, 치욕의 역사도 모두 다 소중히 여기면서 그날의 의의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현명한 나라의 백성들은 역사를 소중히 여깁니다. 아울러 그들은 바른 역사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면서 똑같은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최근 국치일이 백범 김구 선생 탄신일과 같은 날임을 알고서 하늘은 우리 민족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는 큰 뜻을 깨달았습니다. 난세에 영웅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29일(음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해는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이듬해로, 일본의 강압적 위협에 따라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게 되는, 첫 단추를 잘못 꿰는 계기가 된 강화도(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해이기도 합니다. 하늘은 앞으로 닥칠 난세를 미리 알고서 황해도 벽촌마을에 한 영웅을 탄생시켰나 봅니다.

왜 백범 선생은 위대합니까


백범 선생과 윤봉길 의사. 민국 14(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마친 뒤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
백범 선생과 윤봉길 의사. 민국 14(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마친 뒤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백범기념관
첫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제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국모 명성황후를 능욕,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범 선생은 분한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 억누를 길이 없던 터에 황해도 치하포 나루터에서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인을 국모 시해범 일당으로 알고서 그 자리에서 처치하였습니다.

백범 선생은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에 대한 복수심을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의로운 대한 남아의 귀감을 보이셨습니다. 이 일로 백범 선생은 감옥소 수감과 탈옥, 도피 유랑생활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상해로 망명하셨습니다.


둘째, 백범 선생은 늘 우리 정부에서 가장 천하고 낮은 자리를 원하셨습니다. 평생 소원이 독립정부의 문지기였습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백범 선생은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에게 임시정부 문지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백범 선생은 그로부터 5년간 경무국장으로서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밀정들에 대한 심문관, 검사, 판사뿐만 아니라 형 집행까지도 담당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 뒤 임시정부 노동총판, 내무총장, 국무령, 국무위원, 주석으로 중임을 두루 맡으셨습니다. 1926년 임시정부가 좌우대립 등 사분오열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늘 낮은 자리를 원하는 백범 선생의 큰 도량에 동지들이 감복하여 마침내 갈등은 수습되고, 임시정부의 명맥도 백범 선생의 지도력으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셋째, 이봉창 의사를 시켜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하고, 윤봉길 의사에게 상해 홍구공원 일왕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하여 한국인의 의기를 세계 만방에 떨쳤습니다.

이 의거들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었으며, 일제 압제하에서도 민족혼이 살아 있는 본을 보였습니다. 아울러 오만방자한 일제의 간담도 서늘케 했습니다. 이를 본 장개석 주석은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 대한 남아가 하였다고 극찬하였습니다. 이에 백범 선생은 장개석 주석과 면담, 낙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을 설치하여 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38선에 선 백범 선생 (오른편 아드님 김신 씨 왼편 비서 선우진 씨) 1948. 4.
38선에 선 백범 선생 (오른편 아드님 김신 씨 왼편 비서 선우진 씨) 1948. 4.백범기념관
넷째, 일제 패망 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단정을 극구 반대하면서 일관되게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뜻이 끝내 좌절되자 남북회담을 제안하여 38선을 넘어 평양 남북연석회의에 참석, <공동성명서> 발표를 하고 남한만 아니라 북한의 단정수립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백범 선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시다가 끝내 분단 세력의 흉탄에 쓰러지셨습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怨鬼)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대한민국 30(1948)년 2월 10일]


다섯째 평생 근검절약과 도덕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백범 선생은 늘 수수한 차림새일 뿐만 아니라, 망명생활 내내 풍찬 노숙하셨고, 광복 후 귀국하신 뒤에도 며느님에게 일식이찬만 차리라고 당부하시는 등, 근검절약이 몸에 배셨습니다. 1924년 49세의 춘추에 아내와 사별한 뒤 동포의 집에 떠돌며 문전걸식하다시피 하면서도 끝내 재혼치 않았습니다.

내가 백암 박은식 선생 후손에게 들은 바, 백범 선생은 상해시절 동포 집에 들르면 쌀뒤주부터 점검 후 말없이 채워주고 가셨다는 일화를 들었습니다. 일부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동포들의 의연금을 유용한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고 하지만 백범 선생에게서는 어머니가 한밤중에 상해 뒷골목 쓰레기 더미에서 배추 겉껍질을 주워 먹을 만큼 청렴결백하게 사셨습니다. 이밖에도 백범 선생의 위대함을 어찌 짧은 글로 다 옮기겠습니까?

백범 기념관의 석상
백범 기념관의 석상박도
현대사에 백범 선생이 계시기에 우리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상투적으로 비하하는 말 가운데 "조선 놈들은 단결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백범은 늘 민족의 단결에 앞장서고 조국독립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였습니다.

일제 폭도가 남의 나라 대궐에 침범하여 국모를 시해해도 고관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숨을 죽일 때, 백범 당신은 칼을 숨긴 왜인을 보고 철천지원수를 갚고자 앞뒤 가리지 않고 응징하였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런 일들을 과감히 하였겠습니까? 당신이 아니면 임시정부가 끝까지 명맥을 이어왔겠습니까?

당신은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백범 선생님! 130돌 생신을 경하 드립니다. 삼가 당신을 추모하는 이 땅의 겨레와 함께 엎드려 명복을 빕니다.

이 나라 이 겨레를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2부로 되었습니다. 다음 기사는 '백범 어록 편'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2부로 되었습니다. 다음 기사는 '백범 어록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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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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