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선생과 윤봉길 의사. 민국 14(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마친 뒤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백범기념관
첫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제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국모 명성황후를 능욕,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범 선생은 분한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 억누를 길이 없던 터에 황해도 치하포 나루터에서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인을 국모 시해범 일당으로 알고서 그 자리에서 처치하였습니다.
백범 선생은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에 대한 복수심을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의로운 대한 남아의 귀감을 보이셨습니다. 이 일로 백범 선생은 감옥소 수감과 탈옥, 도피 유랑생활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상해로 망명하셨습니다.
둘째, 백범 선생은 늘 우리 정부에서 가장 천하고 낮은 자리를 원하셨습니다. 평생 소원이 독립정부의 문지기였습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백범 선생은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에게 임시정부 문지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백범 선생은 그로부터 5년간 경무국장으로서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밀정들에 대한 심문관, 검사, 판사뿐만 아니라 형 집행까지도 담당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 뒤 임시정부 노동총판, 내무총장, 국무령, 국무위원, 주석으로 중임을 두루 맡으셨습니다. 1926년 임시정부가 좌우대립 등 사분오열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늘 낮은 자리를 원하는 백범 선생의 큰 도량에 동지들이 감복하여 마침내 갈등은 수습되고, 임시정부의 명맥도 백범 선생의 지도력으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셋째, 이봉창 의사를 시켜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하고, 윤봉길 의사에게 상해 홍구공원 일왕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하여 한국인의 의기를 세계 만방에 떨쳤습니다.
이 의거들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었으며, 일제 압제하에서도 민족혼이 살아 있는 본을 보였습니다. 아울러 오만방자한 일제의 간담도 서늘케 했습니다. 이를 본 장개석 주석은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 대한 남아가 하였다고 극찬하였습니다. 이에 백범 선생은 장개석 주석과 면담, 낙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을 설치하여 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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