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4회

등록 2006.09.01 08:22수정 2006.09.0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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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여우같은 머리를 가졌으니 내가 자네처럼 이곳에 올 줄 알았겠군. 운중보주가 나 까지 부를 것이라고 이미 알았을 것이란 말일세.”


따지듯 묻는 풍철한에게 함곡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긍정이었다. 함곡과 같은 인물은 앉아서도 천리를 본다고 소문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좋던, 싫던 같은 곳에 머물고 있었고, 같은 배를 탄 운명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데려왔나? 아직도 자네의 그 심술은 여전하군.”

“자네의 입장을 생각해 주기에는 내가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네. 나는 지금도 몹시 두렵네.”

“그렇게 두렵다면 이곳엔 왜 왔나?”

“무적신창이 대문 앞에서 꼬박 다섯 시진을 기다렸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로 말이야.”


“한시진만 더 지났다면 자네를 꼬치 꿰듯이 꿰었겠군.”

“나 뿐 아니라 아내와 선화 역시 같은 꼴이 되었을 걸세.”


“살기 위해서 온 것이로군. 그렇다고 살 길이 있나?”

“와서 살 길을 찾아보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네. 아까 자네가 좌등에게 한번 붙자고 한 것처럼 말이야.”

어느 면에서는 좌등과 드잡이질 하려고 한 일은 의도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운중보의 인물과 크게 다투고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나가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을 함곡이 알아챈 것이다.

“그런데 왜 말린 것인가?”

“그런 방법은 오히려 함정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네.”

“지금도 우리는 함정에 빠져 있지 않은가?”

“그 함정의 올가미를 더욱 조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했네. 그 자리에서 붙을 것도 아니었고, 결국 밖으로 나와야 할 텐데 그것을 보주가 모르리라 생각하는가?”

“고의로 알리려고 했네.”

“보주는 우리에게 용봉쌍비를 주었네. 만약 자네와 좌등이 붙기도 전에 보주가 나타나서 손님에게 무례했으니 좌등에게 팔이라도 하나 자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좌등은 거침없이 잘랐을 터였다. 그리고 싸움은 붙기도 전에 끝났을 것이고, 그것은 앞으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좌등의 팔이 잘린 이후에는 어떠한 핑계를 대더라도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보주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풍철한은 얼굴을 굳혔다.

“아무래도 저녁에 거절하는 게 어떤가? 이 사건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이야.”

“불가능한 일이네. 이미 보주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일을 맡겼네. 이유는 분명하지. 이 상황에서 철담을 살해한 흉수는 보주라고 할 수 밖에 없네. 그 사실은 누구보다 보주가 잘 알고 있을 걸세. 그런 와중에서 우리가 현장을 본 후에 손을 떼겠다고 한다면 그 의심은 더욱 굳어지게 되지. 보주는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하려 할게야.”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철담이 죽었다는 소식과 그 조사를 자신들에게 맡긴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들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오일 동안은 살아 있을 테지만 오일 후에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아니 흉수를 잡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조사를 위해서는 이곳 인물들을 상세하게 파악해야 했다. 이곳 손님까지 모두 파악해야 했다. 그것은 운중보를 손바닥 보듯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문파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을 그대로 둘 문파가 얼마나 있을까? 보주가 용서한다 해도 다른 인물들이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더구나 보주는 이번 회갑연을 끝으로 무림을 떠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후계를 잇는 자가 자신들을 가만히 둘까? 사건을 해결한다면 아마 이곳을 떠날 때 푸짐한 선물과 함께 대대적인 환송연을 베풀어 주겠지만, 이곳을 나가는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칼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이었다.

“방법이 있나?”

“없네. 있다면 내가 여기에 왜 왔겠나?”

“자네 같은 사람도 이럴 때가 있는지 몰랐군.”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 안에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네. 자네가 좋아하는 방법 아닌가?”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여전히 자네가 싫네.”

“나 역시 자네를 좋아하지 않아.”

그 말로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그들의 시선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운중보의 여러 전각들이 서 있는 아래를 보고 있었다. 전망이 좋은 곳이어서 그런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고요히 서있는 전각과 오밀조밀한 풍광이 들어왔다. 그 사이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잘 어울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확실히 이층이 좋군.”

“바꿀 텐가? 하지만 이층은 방이 두 개 뿐이네.”

그러다 문득 함곡이 시선을 돌려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의제 생사판(生死判)은 언제 도착할 예정인가?”

중원사괴 중 둘째 생사판 종문천(鍾門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무에게나 동전의 앞뒤를 정하고 맞추지 못하면 죽인다고 소문이 난 괴물이었다. 풍철한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는 여기에 오지 않네. 내일 아침 정도면 유향(有香)이 도착할걸세.”

“역시 자네의 음흉함은 정상적인 추측을 할 수 없게 만드는군. 그에게 뒤를 준비시켰나? 그렇다면 자네는 선택을 잘못했군.”

그제 서야 풍철한은 시선을 돌려 함곡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가?”

“생사판은 침착하지만 이미 위험인물로 지목되었네. 그가 어떠한 준비를 하던 운중보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지. 오히려 넷째인 혈녹접(血綠蝶) 소유향(蘇有香)이었다면 결정적인 여우 굴 하나 정도는 마련했을 텐데....”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네. 자네 역시 선화를 데려오는 게 아니라 자네의 아내를 데리고 왔어야 하지.”

그 말에 두 사람은 뜻 모를 웃음을 피식 흘렸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 많이 알고 있어 기분 나쁠 정도였다.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지도 몰랐다.

“헌데...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보주는 왜 우리를 선택했을까? 물론 자네는 박학다식하고 영민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니 이런 일에 적합하다고 하지만 나 같은 인물이야 널려 있지 않은가?”

함곡이 장난스런 미소를 베어 물었다.

“중원 천지가 좁다고 활개치고 다니면서 자신 위에 사람 없다고 살아온 자네 입에서 오랜 만에 정직한 말을 들어 보는군. 죽을 때가 되면 정직해지는 모양이지?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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