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전은 간첩단 사건이 아니었다"

경찰청 과거사위, 보도연맹·남민전 사건 등 중간 발표... "군·경, 좌익 아닌 양민도 학살"

등록 2006.09.14 14:41수정 2006.09.1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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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체 : 14일 오후 4시 25분]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분류돼 군과 경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은 1만7716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희대의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남민전 사건의 경우도 "반국가단체를 구성해 활동한 것은 맞지만 정부 발표대로 간첩단은 아니었다"고 공식 조사됐다. 간첩이라는 증거도 없이 서둘러 '간첩단 사건'으로 발표한 것은 문제이며, 이에 대한 피해는 인정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보도연맹원, 좌익활동가 다수지만 선량한 피해자도 포함"

경찰청 과거사위원회 이종수 위원장
경찰청 과거사위원회 이종수 위원장오마이TV 문경미
경찰청과거사위원회(위원장 이종수)는 14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 미근동 청사 2층 브리핑룸에서 중간조사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연맹원 학살의혹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남민전 사건) ▲46년 대구 10·1 사건 등 3가지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보도연맹원 사건과 관련해 "보도연맹원 명부, 경찰 전산자료, 참전 경찰관들의 진술, 보도자료 등을 종합하면 보도연맹원의 상당수는 보도연맹 가입 전에 좌익활동을 했다가 전향했던 자들이라고 판단"되지만, "좌익 활동을 하지 않은 선량한 피해자들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는 보도연맹원의 규모와 성격을 단정해 판단하기 어렵"지만 "계엄령 아래에서 헌병사령관의 특별조치령 공고 이전에 치안국장의 구속 명령에 따라 시행한 예비 검속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한 예비 검속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는 경찰이 전담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계엄 이후부터는 헌병이 예비 검속에 관여한 사실도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보도연맹원의 총체적 피해규모와 관련해서는 경찰청 전산자료 이외의 다른 공식 자료를 확인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사위는 "경찰청 전산자료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처형자의 총 규모는 1만7716명"이라며 "경찰청 자료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보도연맹원 희생자는 3593명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78년 중앙정보부에서 만들어낸 보도연맹 관련 처형자 명단에 따르면, 처형자 2만6330명과 연고자 3만8135명이 기록돼 있으나 자료의 작성근거·자료의 성격·활용목적·작성기준을 확인하지 못했고, 개인별 활동내역이 기재돼 있지 않아 분석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번 경찰청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경찰에 의한 처형 1081명 ▲국군에 의한 처형 5157명으로 각각 나타났으며, 한국전쟁 당시 경찰과 군이 민간인을 적법한 사법절차를 따르지 않고 집단학살한 의혹이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다.

또한 경찰이 한국전쟁 이후, 한국전쟁 당시 처형자와 처형자의 연고자에 대한 존안자료를 전산화해서 신원조사 등에 활용했다는 의혹도 사실로 드러났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경찰청 과거사위는 "국가기관인 경찰과 군이 적법한 사법절차에서 벗어나 좌익활동 관련자나 무관한 양민을 학살한 것은 잘못"이라며 반성을 유도하기도 했다.

"남민전 조직의 위험성 과장 가능성"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14일 오후 서울 경찰청 브리핑룸에서 보도연맹·남민전 사건 등에 대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14일 오후 서울 경찰청 브리핑룸에서 보도연맹·남민전 사건 등에 대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오마이TV 문경미
남민전 사건과 관련해서도 ▲경찰이 수사단계에서 정확한 사실확인 없이 간첩단으로 몰아 언론보도에 활용해 안보위기의식을 조장한 점 ▲내무부 장관이 직접 발표해 남민전 조직의 위험성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는 점 ▲간첩단 사건으로 오보된 부분을 정정발표하지 않은 점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무엇보다 경찰청 과거사위는 "남민전 사건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나서 위기를 조장하고 언론보도의 오보를 양산했다는 점에서 잘못된 행동"임을 발표했다.

또한 남민전 사건이 간첩단 사건은 아니었지만, 반국가단체를 구성해 활동한 것은 맞다는 결론에 다다랐다고 분석했다. 경찰청과거사위는 "남민전 조직은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북을 찬양하며, 북과의 연계를 시도한 반국가단체라는 대법원의 판단에 이견이 없다"며 "고문·가혹행위와 관련해서도 입증자료를 찾을 수 없고, 당사자들이 상반된 진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문의 유무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남민전 사건에서 파생된 고문·가혹행위와 관련해서는 다소 미온적 조사결과를 발표해 향후 논란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문 유무는 팽팽한 양측 견해차로 판가름 못해

이국재 경찰청 과거사위원회 위원은 "수사담당관들은 당시 남민전 관계자들이 수사관들로부터 고문과 가혹행위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했다"며 "고문피해자와 경찰 수사관 사이에 진술이 팽팽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객관적 증거 없이 단정적으로 발표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소수 몇 명(한자리수) 폭언을 당했다는 분도, 구타를 당했다는 분도 한두 명 있기는 하나 최후 진술을 믿고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며 "당시 의무경찰이 조사할 때 큰소리가 들렸다는 진술을 존중해 가혹행위가 없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는 게 아니냐 추정발표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민주화운동심의보상위원회에서 이미 민주화운동으로 지정해 보상하기로 결정한 남민전 사건에 대해 경찰청 과거사위원회가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고문 유무에 대한 입증자료를 찾을 수 없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혀 향후 동일 사건에 대한 정부기구간 입장차가 드러난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10·1 사건' 발포는 지휘계통 밟지 않아 문제

46년 10월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노조 총파업투쟁이 대구지역에서도 지속되던 가운데 10월 1일 대구역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1명이 숨진 이후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킨 '10·1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는 '10·1 사건'에 대해 "당시 식량의 절대 부족 등 사회·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을 이용한 좌익세력들의 활동에 대한 경찰의 시위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매듭지었다.

또한 "당시 경찰의 발포는 시위해산이 목적이었다고 해도 최후의 공권력인 발포를 명확한 명령 지휘계통에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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