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는 친일파 검거를 위해 출범했지만, 결국 친일파들에게 쫓겨 그 '안방'을 내주고 말았다. 1949년 7월에 등장한 제2기 반민특위는 문자 그대로 친일파들이었다. 이번 글은 7단계 물리적 타격과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이 어떤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에 관한 네 번째 기사다. <필자 주>
1949년 3월 초부터 반민특위는 서서히 약화하기 시작하였다. 활동 개시 2개월여 만에 힘을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상황은 1단계 관망, 2단계 내부단결, 3단계 국회 압박, 4단계 장외투쟁, 5단계 암살 음모, 6단계 도피와 맞불에 이어 최종 단계로 접어든다. 약화하는 반민특위를 고꾸라뜨리기 위하여 친일파들은 최후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반민특위와 친일세력이 공방을 주고받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3월 28일 첫 친일 공판이 법정에서 열렸다. 피고인이 된 이기용·박흥식(화신재벌)이 처음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친일파들은 재판부를 압박하기 위하여 법정 밖에서 장외투쟁을 벌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기간 친일파들은 서울 탑골공원과 반민특위 사무실 앞에서 반민특위 해체를 소리 높여 외쳤다. 또 그들은 시위를 벌여 "반민특위는 빨갱이"라는 선전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에, 첫 공판에 나왔던 박흥식이 4월 21일 심한 신경쇠약을 이유로 보석 되는 일이 발생했다. 9명의 특별검찰관들이 항의의 표시로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특별재판부는 이미 친일파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박흥식에 이어 친일파 재력가들이 속속 석방되었다. 공판을 3번 받은 최린(민족대표 33인 중 1인)도 공소취하를 받았다. 법정 밖에서 벌어지는 친일파들의 압박에 특별재판부는 서서히 그들 쪽으로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들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킬 만한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1949년 4월 하순에 제1차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국회프락치사건이란 1949년 제헌국회 내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fraktsiya)로 몰려 대거 구속된 사건을 말한다. 1차 프락치사건에서는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로 의원이 구속되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 제정) 위반이었다.
여기서 잠시 반민특위 와해 과정과 국회프락치사건의 상호 관련성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반민특위가 등장한 이후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주 표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집중적인 포화 속에 1949년 3월 초부터 반민특위가 약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친일파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완전히 제거할 최후의 일격을 가할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반민특위 무력화 작전
그런데 반민특위를 완전히 제거하자면, 그 뿌리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민특위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반민특위를 잉태한 국회였다. 국회를 무력화시키면 반민특위도 완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친일파들의 계산이었다.
시간적 여유를 갖게 친일파들은 이렇게 해서 국회와 반민특위를 상대로 양방향 포격을 가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국회를 상대로 한 것이 바로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특위를 그 뿌리에서부터 위협할 수 있는 결정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은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시점이다. 1948년 12월 1일이라는 날짜는 반민특위가 본격 활동을 준비하던 시기인 동시에 반민특위에 대한 친일파들의 공세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은 주로 반민특위를 겨냥하여 시행되었다. 국가보안법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한 수사가 헌병대·검찰·경찰의 공조 속에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3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에는 이들 기관이 사실상 친일파의 수중에 있었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된 의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5월 23일 국회에 상정되었다. 그런데 그동안 친일청산을 주도하던 국회에서마저 이상 기류가 나타났다. 석방 요구 결의안이 88대 95로 부결된 것이다. 이는 친일파들의 집중적인 포화 속에 국회마저 위축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결의안 표결이 진행되는 동안, 친일파들은 서울 시내에서 "국회 내 빨갱이들을 추방하자"며 시위를 벌였다. 표결에 임한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일파들의 희망대로 석방 요구 결의안은 결국 부결되었다.
한편,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그 88명을 표적으로 한 공세도 진행되었다. 5월 31일 서울 탑공공원에서 국민계몽회라는 단체가 집회를 열어, "국회 내 빨갱이 88 의원을 잡아내라"고 요구했다.
6월 2일에는 친일 유령단체들이 국회 앞에서 특위 요원들을 비난하면서 친일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제 반민특위는 더는 수사기관이 아니었다. 친일파가 수사기관이 되고, 반민특위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들은 한편으로는 국회를 무력화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반민특위에 대한 물리적 타격에 들어갔다. 최후의 일격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1949년 6월 3일. 친일파가 주도하는 시위대가 특위본부를 포위했다. 그리고는 특위본부로 밀고 들어갔다. 국가기관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경찰은 일부러 출동하지 않았다. 특위 소속의 특경대원들도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공포탄을 쏘며 해산 작전에 나섰다. 시위대가 밀리는 듯하자, 그제야 경찰들이 등장했다.
특경대는 시위의 주동자를 찾아 나섰다. 그 주동자는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였다. 민간인도 아닌 경찰이 반민특위를 상대로 시위를 주도했던 것이다. 최운하 외에도 20여 명의 선동자들이 연행되었다.
특경대가 최운하를 구속하자, 친일경찰들이 또 반발하고 나섰다. 최운하 구속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각 경찰서 사찰경찰 150여 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서울시경 경찰 전원이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경찰들이 국가 기관의 해산을 요구한 것이다.
특경대가 눈에 거슬린 친일파들은 이번에는 특경대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반민특위의 수족을 잘라 버리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6월 5일 내무차관 장경근, 시경국장 김태선,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보안과장 이계무 등이 모여 특경대 해산 음모를 꾸몄다. 이날의 모임은 이승만의 사전양해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음 날인 6월 6일 윤기병은 중부경찰서 병력 40명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본부에서 35명을 연행했다. 여기에는 특경대원 24명과 특위 직원 및 경호원 9명이 포함되었다. 한편, 지방 각지에서도 특위 지부들이 동시에 습격을 받았다. 6월 6일은 전국 곳곳에서 반민특위가 일대 수난을 당한 날이었다.
친일경찰들이 황당한 불법행위를 저지르자, 이번에는 국회가 대응에 나섰다. 국회가 내각퇴진 결의안을 상정한 것이다. 이 결의안은 89 대 59로 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타협 의사를 내비쳤다. 국회와 이승만은 친일경찰들과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하는 데에 합의했다. 포로 교환 석방을 연상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각 퇴진 결의는 없었던 것으로 되었다.
친일파 반민특위를 접수하다
반민특위가 잠시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졌다. 1949년 6월의 일이었다. 특위위원인 노일환·서용길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김약수 국회 부의장도 구속되었다.
구속된 사람들은 주로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이었는데, 이들은 반민특위 활동에 가담하였거나 혹은 미군 철수나 남북정치회의 개최 등을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특별재판관 최국현·김장열이 사직하였다.
2차례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더 친일파들을 검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무실을 차린 지 5개월 만에 반민특위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친일파를 추적하기 위해 출범한 조직이 도리어 친일파에게 추적당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의 파상공세에 시달려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친일파들은 최후의 '확인사살'에 들어갔다. 반민법 관련 법률을 개정함으로써 반민특위의 법적 근거를 아예 약화시켜 버리겠다는 것이다. 쓰러진 반민특위의 등을 짓누르는 행위였다.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반민법 공소시효를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31일로 단축하는 개정안이 제안되었다. 이 개정안은 114 대 9의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반민법이 잘못된 법이라고 생각했으면 반민법 자체를 없앴을 텐데, 자신들도 스스로 죄인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민법을 없애지는 못하고 대신 공소시효를 단축해 버린 것이다.
공소시효 개정안이 가결된 다음날, 김상덕 위원장 이하 특위 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특별검찰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소시효 만료가 코앞에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수사는 무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6월 29일에는 김구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반민특위의 마지막 의지처까지 사라졌다. 민족진영을 반민특위에서 몰아낸 친일파들은 이제 반민특위에 무혈 입성하였다. 김상덕 위원장의 후임으로 이인이라는 자가 신임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그전까지 반민특위를 반대하던 자였다.
이인을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반민특위는 중요한 과제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잔무 처리'였다. 7월부터는 친일파들이 반민특위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출범한 반민특위는 이와 같이 친일파들의 격렬한 공세 앞에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무력화되고 말았다. 반민특위의 추적을 받던 친일파들은 '어느새 몸을 확 돌려' 반민특위를 추적하더니, 1949년 7월부터는 아예 반민특위의 '안방'을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반민특위는 결국 친일파들의 '아지트'가 되고 말았다.
1948∼49년의 친일청산은 그렇게 해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인과 가문의 목숨을 건 친일파들의 사투 앞에서 '점잖은' 반민특위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럼, 1948∼49년 당시의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압도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 점에 관하여는 마지막 5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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