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6회

등록 2006.09.19 08:13수정 2006.09.19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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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철한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서당두란 자는 이미 배에서 본 적이 있었다. 동창의 당두라면 무공 역시 일류고수급이다. 그런 자가 자신의 거처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한번 그의 뇌리로 설중행이 떠올랐다.

‘이 자식 이곳에 올 때 없었다. 그럼..?’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자식이 말한 비밀조직이란 동창에 소속된 조직이었던가? 그래서 소속을 밝히지 않겠다고 했나? 맞군. 동창이었군. 그 자식이 금륜마방의 역리라고 할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앞뒤가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동창이 가지고 있는 비밀조직원중의 하나였고, 이번 일로 인하여 그 조직은 사라진 것이다. 함정이었다는 말을 하며 동료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대가로 반드시 그 일을 시킨 자를 죽이겠다고 하더니 그 자가 서당두였던게 아닐까?

그렇다면 부교 위에 있던 자가 서당두의 일행이라는 것도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설중행과 그 자는 역시 한 패거리였고, 설중행을 암중으로 도왔던 놈이 그 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역시 확신으로 바뀌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우연하게 데리고 들어 온 놈이 모든 일에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조화 속인지 알 수 없었다. 풍철한은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그 때문에 보주가 뭔가 말한 것 같고 함곡이 대답한 것 같은데 듣지 못했다.


“자네 역시 마찬가지네.”

아마 풍철한이 대답이 없자 보주는 다짐을 받고자 다시 말한 것 같았다. 그는 함곡을 바라보았다. 함곡이 그의 표정을 보고는 대신 대답했다.


“이 친구의 생각도 같겠지요. 어차피 오일 동안은 자네와 내가 이 안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조사할 책임이 있다는 말일세.”

이 사건까지 조사를 부탁한 말이었던 모양이었다. 함곡의 눈짓을 보고 풍철한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에 보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를 마실 시간조차 없군. 일단 가 보세.”

식사를 같이 했던 인물들 역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풍철한의 머리 속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함곡은 풍철한과 달리 이제는 적극적으로 운중보의 일에 뛰어들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용추의 등장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도 같았다.

22

신태감과 경후(卿珝)는 상만천이 마련한 저녁식사를 같이 하다가 서교민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청룡각으로 돌아왔다. 당두란 직위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동창의 당두에게는 무소불위의 권한이 쥐어져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고작 신태감을 모시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동창의 당두는 어지간한 벼슬아치들에겐 공포감을 심어 줄 수 있는 존재였다. 용추가 그들과 함께 온 것은 의외였다. 용추는 상만천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는 외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터였다. 아마 상만천이 도와주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서교민은 탁자 아래 박혀 있었는데 그의 머리는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져 있어 매우 불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체를 보는 순간 신태감과 경후, 그리고 용추는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고 있었다.

사인(死因)은 분명했다. 흉수는 시신에 남은 흔적을 누구라도 잘 볼 수 있게 서교민의 시신을 그렇게 놓아둔 것 같았다. 머리가 의자에 기대어져 약간 틀어진 머리 아래로 서교민의 목이 드러나 있었고, 그 목에는 세 개의 동전만한 반점이 품(品) 자 형태로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 반점의 가운데에는 침을 찌른 듯한 미세한 흔적이 있고 반점은 검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반점이 하나만 더 있었고, 그 형태가 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면 뱀에게 물렸을 것이라고 오인할 정도였다. 이빨이 세 개인 뱀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충격에 빠진 듯 했다. 서교민의 숨을 끊어 놓은 그 흔적을 보는 순간 그들의 몸은 굳어 들었고, 경악스런 표정에서 일제히 불신(不信)과 의혹스런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동창의 첩형인 경후는 사십대 후반의 몸집이 작은 사내였다.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여장이라도 해 놓는다면 여자라고 오인할 정도로 곱상했다. 하지만 그의 눈매는 가늘었고, 날카로웠다. 그는 서교민의 시체에 다가가 탁자 밑에서 끌어내려는 듯 조심스럽게 옆의 의자를 치우려 했다.

“가만 놔둬. 이곳은 운중보야.”

신태감은 나직했지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운중보 내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리 자신들의 일이라 해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이미 이 사건에 관해 벌써 보고는 되었을 터, 운중보의 조치를 기다리는 것이 예의였다.

더구나 서교민을 죽인 저 흔적은 건들면 안 되었다. 반드시 운중보주가 보아야할 흔적이었다. 너무나 확실해 보여 고의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런 흔적을 남기는 무서운 자는 이미 이십육 년 전에 사라졌지만 그 뒤에 두 번이나 저러한 흔적이 나타났고, 그것은 누군가 고의로 그런 흔적을 만든 것이란 결론이 내려졌다. 이번도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확인해 줄 사람은 운중보주였다.

물론 고의로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감히 운중보에서 이런 흔적이 나왔다는 것 자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태감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만든 흔적으로 보기엔 너무나 사실감이 있었고 생생했다.

경후는 신태감의 말에 서교민을 건들려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 방안의 흔적을 찾기 위해 주위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조사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그는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든 그가 일단 범인으로 지목하면 반드시 범인이 되었고, 그러한 능력으로 그는 많은 반대파 제신(諸臣)들을 숙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억지를 부린 건 아니었다. 그의 논거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그를 뒷받침할 물증(物證)과 간접적인 증인들과도 앞뒤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반론(反論)을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사자마저 억울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확실해 변명을 댈 수 없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아직 초여름이지만 이곳의 날씨는 습기가 느껴지고 더운 듯 했으니 흉수가 아니더라도 열어 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

경후의 눈이 반짝였다. 창문 바로 아래에 바늘과도 같은 솔잎이 두 개 떨어져 있었다.

‘바람을 타고 들어 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창문을 넘어오다가 떨어뜨린 것일까?’

그러나 그는 곧 흉수가 창문을 넘어왔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솔잎은 바람을 타고 들어올 수 있는 낙엽 같은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은 푸른빛이 생생하여 바로 전까지도 분명 소나무에 붙어 있었을 솔잎이었다. 웬만한 바람에 날릴 솔잎이 아니었다. 그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약 삼장 정도 되는 거리를 두고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그곳에는 위태롭게 소나무들이 바위틈을 비집고 기묘한 형상으로 서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바람이 심하게 불었어도 솔잎은 이곳으로 날아들어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후는 창문 밖으로 목을 내밀어 바닥을 훑어보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솔잎이 바람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올 정도라면 마당바닥에는 솔잎이 널려 있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없었다. 결론은 누군가의 옷에 묻어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다면 흉수는 창문을 넘어 들어왔을 것이다.

‘운중보에 침입자가 있는 것일까?’

침입자가 아니더라도 일행이 아닌 외부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경후는 다시 시선을 돌려 한쪽에 휘장이 쳐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침상이 놓여져 있는 곳. 그는 휘장을 열다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대로 침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이불이 한쪽으로 밀려져 있어 누군가가 들어 누웠거나, 앉아 있었던 흔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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