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 '죽음' 뒤에 숨겨진 몇 가지

19세기 '조선-천주교-서양' 에 대한 재평가 필요

등록 2006.09.20 15:02수정 2006.09.2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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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9월은 천주교의 순교자 성월(聖月)이다. 이는 1846년 9월 16일 한성 새남터(서울 용산구 이촌동)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등을 기리기 위한 기간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주일인 지난 17일(일요일)에 천주교 성당들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가 울려 퍼졌다.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에 짙어 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동지사 오가던 길 삼천리 트였건만
복음의 사도 앞에 닫혀진 조국의 문
겨레의 잠 깨우려 애타신 그의 넋이
이역의 별빛 아래 외로이 슬펐어라"


김대건 신부가 1842년 이후 외국인 신부들의 조선 잠입을 돕기 위해 만주에서 분투하던 시절에 관한 노래다. 조선에서 청으로 파견된 외교사절인 ‘동지사’(冬至使)가 오가던 루트에서 종교적 임무를 받고 활동하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뒤에 가려진 것들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자가 된 김대건 신부가 한국 천주교의 개척에 선구자적 기여를 했으며, 이후 한국 천주교가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최근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한국 천주교는 한국 사회를 위해 지대한 공로를 세운 바가 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19세기 조선 정부가 한국 천주교에 대해 압박을 가한 것은 종교적 측면에서는 분명 박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분명 그러했다. 조선이 이 시기에 외래문화에 대해 탄압정책을 취한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분명 '세련되지 못한 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과정에서, 한국 천주교는 신자 대중에게 혹시라도 역사인식상의 혼란을 주고 있지나 않은지 한번쯤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한국 천주교가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부각시키면 시킬수록, 그 김대건 신부를 순교로 내몬 19세기의 조선 정부는 그저 사악한 박해자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떠올리며 눈물을 떨어뜨리는 천주교 신도로서는 19세기 조선 정부를 그저 사탄 마귀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시에, 19세기 서양세력에 대해서는 '보호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신도가 일상생활로 돌아와 TV나 소설·영화 등에서 19세기 한반도를 생각할 때에는, 위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조선 정부를 인식하게 된다. 성당에서는 19세기 조선 정부를 ‘박해자’로 인식하던 천주교 신도가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그 조선 정부를 ‘나라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무능한 정권’이라고 인식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서양세력을 침략자로, 조선 정부를 패배자로 인식하게 된다.

조선 정부와 서양세력에 대해, 성당에서는 박해자 대 보호자의 관계로 인식하고, 일상생활에서는 패배자 대 침략자의 관계로 인식한다는 것은 분명 오류 내지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상의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한국 천주교가 김대건 신부의 순교에 관한 정보를 전체적 맥락 속에서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상의 배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 채 현상 자체에 관한 정보가 제공되기 때문에 신자 대중이 인식상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길거리에서 A가 B를 때리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 한 장을 놓고 A를 폭행범으로 몰아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A와 B가 서로 폭행을 가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A가 B를 상대로 정당방위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 한 장의 사진만 놓고는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가 신자 대중의 인식 속에 내재된 이러한 모순을 해소시키려면,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정보를 보다 전체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846년 9월 16일의 일을 '순교'로만 규정할 것이 아니라 일단은 객관적 용어인 ‘죽음’으로 규정하는 바탕 위에서, 사건의 전후맥락을 고려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대중의 인식이 날로 향상되는 상황 속에서, 과거처럼 단편적인 사실만 제공한다면 신자 대중 속에는 자신이 배우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 대중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한국 천주교는 이제는 좀 더 세련된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대건 처형, 종교적 문제인가? 정치적 문제인가?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2가지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 번째는, 조선 정부의 김대건 처형이 종교적 문제인가 정치적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1846년 6월 시점만 해도, 조선 정부는 김대건 신부를 처형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정부의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에게 세계지리에 대한 책을 써 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로, 김대건 신부와 서양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 혹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또 이 시기는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던 풍양 조씨 세력이 이미 몰락한 때였다. 당시의 집권 세력으로서는 천주교에 대해 그다지 반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던 조선 정부가 김대건 처형 쪽으로 급선회한 것은 프랑스인 신부 3명의 처형을 문제 삼아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침투한 프랑스 해군 함대 때문이었다.

김대건 신부에 대해 종교적 반감은커녕 문화적 호기심마저 갖고 있던 조선 정부를 강경 노선으로 내몬 것은 바로 프랑스 함대의 침투였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정부의 김대건 신부 처형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였던 것이다.

또 우리는 1846년이라는 시점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로부터 6년 전에는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4년 전에는 난징조약(남경조약)이 체결되었다. 난공불락으로만 여겨졌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거인 중국이 서양세력 앞에서 무너진 것은 조선·일본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중국의 굴욕'에 놀란 일본 역시 1853년 개항 이전까지는 서양세력에 대해 쇄국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조선 또한 중국의 굴욕 앞에서 어떤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당시의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서세동점으로부터 자국의 주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가장 절실한 화두였다. 서양 종교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할 뿐이었다.

19세기 조선 정부가 김대건 신부를 처형한 것은 그러한 쇄국 차원의 일이었다. 절대로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김대건이 서양세력의 ‘앞잡이’가 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처형을 결정한 것이지, 결코 그가 서양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조선 지배층은 새로운 종교에 대해 비교적 열린 마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조선의 국가이념인 유학은 종교적 색채가 상대적으로 희박했다. 유학은 종교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 체계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유학을 유교로 지칭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뒤따른다. 종교 중립적인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지배층은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정황들을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처형을 종교적 차원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서 일탈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종교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문화적·외교적 차원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조선 정부는 서세동점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천주교라는 또 다른 정치세력을 압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대건 신부의 처형은 어찌 보면 종교적 탄압이 아니라 정치적 탄압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일부 기독교(여기서는 천주교+개신교) 우익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조선이 서양세력에게 문호를 쉽게 개방했다면, 조선이 쉽사리 주권을 잃었을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조선은 더 일찍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아시아·아프리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천주교와 서양세력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했다면, 과연 이 세상은 신국(神國)이 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간명하다. 지난 200년간의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주권을 잃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이 이후 과연 신국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이들 지역은 신국이 되기는커녕 서양세력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조선 정부가 천주교로 상징되는 서양세력에게 아무런 압박도 가하지 않고 문호를 활짝 개방했다면, 아마 일본이 침략하기 이전에 서양세력이 먼저 조선을 집어 삼켰을 것이다. 조선은 신국이 되기는커녕 보다 빨리 서양세력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미개한’ 이교도 국가들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찌 보면 천주님(天主님)을 모독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천주님의 우주 통치권과 그분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일 수 있다.

이미 우주 전체를 통치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을 자신의 백성으로 다스리고 있는 분이 무엇이 아쉬워서 조선이라는 지상의 작은 공간을 빼앗기 위하여 칼과 대포를 들이댈 필요가 있을까?

그나마 지금은 아시아·아프리카에서 서양세력과 기독교가 밀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독교 우익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천주님이 제3세계에 밀리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 우익론자들의 주장은 이처럼 천주님 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천주님이 인간 나라를 앞세워 이교도 국가들을 정벌하신다는 주장은 그저 인간의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을 볼 때에, 김대건 신부를 처형한 조선 정부의 결정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조선 정부는 서세동점 상황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정부도 결국에는 피해자라 할 수 있다. 한편 서양의 정치세력에게 이용당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첨병 역할을 한 천주교 역시 또 다른 피해자인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임무는?

김대건 신부에 대한 재인식과 관련하여 살펴볼 두 번째 점은 김대건 신부의 임무에 관한 것이다. 청년 김대건을 미래의 신부(神父) 후보로 선택한 프랑스 천주교회는 대체 어떤 동기에서 그렇게 한 것일까? 그들은 과연 김대건을 조선의 자주적인 종교인으로 양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까?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팩트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편전쟁 당시 조선·중국에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프랑스 군함들이 동아시아에 파견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 과정을 마친 김대건은 바로 그 프랑스 군함을 타고 1842년 양자강에 도착하였다.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명령받은 김대건이 프랑스 해군 군함을 타고 중국에 입국하였다는 점은 이후 김대건 신부의 행적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리고 김대건이 실제로 부여받은 임무는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돕는 도우미 역할이었다. 1844년에 그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아 외국인 신부들의 조선 입국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조선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바 있다. 또 동년 10월 그는 페레올 신부를 모시고 배편으로 충청도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바 있다. 이때 그는 페레올 신부를 한양까지 안내했다.

2년 뒤인 1846년에는 만주에 머물고 있던 메스트로 신부 등의 입국을 돕기 위해 서해안 루트를 모색한 바 있다. 김대건 신부는 이 활동을 하던 중에 서해안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해 10월 한성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이와 같은 짧은 행적을 보면, 우리는 김대건 신부의 실제 임무가 조선에서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선교사의 한국 잠입을 안내하는 역할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양 천주교의 길잡이 역할이었던 것이다.

서양세력의 아시아·아프리카 침략에서 첨병 역할을 한 서양 천주교를 위해 김대건은 그 서양 천주교의 첨병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김대건은 누구의 첨병이 된 것일까?

이처럼 결과적으로는 서양세력의 조선 침투를 도운 인물을 한없이 떠받들다 보면, 그 당시 서양세력에게 수난을 당한 조선이라는 나라는 대체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 가해자가 되는 것인가?

김대건 신부가 한국 천주교에 긍정적 기여를 한 측면도 있지만, 민족사적 측면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오를 범한 측면도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죽음에 관해 보다 더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은 서양세력의 침략 앞에서 나라를 지킬 수밖에 없었고 김대건 신부의 죽음도 그 과정에서 나온 사건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조선도 피해자이지만, 서양세력에게 결과적으로 이용당한 당시의 천주교회도 결국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동시에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는 19세기 조선이 아닌 당시의 서양 제국주의세력을 문책해야 한다는 점도 명확히 지적해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할 때, 당시의 서양세력은 천주님을 앞세워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 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가 그런 배경 설명 없이 신도들에게 “척화비 파묻히고 승리가 우뚝했다”(<가톨릭 성가> 289번 ‘병인 순교자 노래’)라고만 가르친다면, 서양세력 앞에서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19세기 우리 조상들의 애환과 수난은 도대체 무엇이 되는 것인가?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기여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구약 대신 신약을 가르쳤듯이, 한국 천주교도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정부와 서양세력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 낀 천주교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은 한국 천주교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노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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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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